국역 141건
연표에 해당하는 왕력편(王歷篇)을 이어,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삼국유사」의 실질적인 첫 부분으로서 ‘기이편(紀異篇)’을 두게 된 이유를 밝힌 항목이다. 중국에서 제왕(帝王)이 출현할 때 신이(神異)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고사를 거론하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런 신이한 사적들이 있었다는 것을 꼭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일이라 하여 배척할 수는 없다는 인식을 피력하면서, 그런 ‘신이사관(神異史觀)’에 입각하여 ‘이적(異蹟)을 기록[紀異]’한 편인 기이편을 책의 맨 앞에 편성하였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내용을 전하는 항목이다. 중국 측 자료로 추정되는 「위서」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먼저 기술한 후, ‘고기’ 즉 우리 측 자료를 통해 단군신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고, 말미에는 이른바 ‘기자조선’의 성립에 관한 중국 측 자료를 제시하였다. 이 항목은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서는 단군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 단계에서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국조 단군’ 인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민족공동체’ 의식이 「삼국유사」의 사실상 본문 첫머리에 해당하는 이 항목에서 본격적으로...
앞서 나온 「고조선」조에 이어 그 후신으로서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부터 멸망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항목이다. 「한서(漢書)」 조선전의 기사를 거의 전재하다시피 하였으나, 특히 후반부는 많이 축약하였다. 원문에는 위만(衛滿)이 ‘위만(魏滿)’으로 적혀 있는데, 일연이 ‘위만(魏滿)’이라고 다르게 표기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한서」 조선전과 그 원전에 해당하는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는 ‘위만(衛滿)’도 ‘위만(魏滿)’도 아닌 단지 ‘만(滿)’으로만 나온다.
마한(馬韓)에 관한 기사를 중국과 우리 측의 기록들에서 발췌하여 소개하는 한편, 사이(四夷)와 구이(九夷), 구한(九韓), 예맥(穢貊)에 관련된 내용들도 중국 측과 우리 측 기록에서 찾아서 함께 전해 주는 항목이다. 최치원 이래 마한을 고구려의 전신으로 보는 인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글에서 백제의 건국지를 ‘금마산(金馬山)’이라고 말한 것을 언급하고, 이를 근거로 ‘마한 즉 백제’설도 일각에서 존재했음을 협주를 통해 알려 주고 있다.
원문 141건
三國遺事 王曆 第一 前漢 宣帝 新羅 五鳳 甲 子 四 第一 赫居世居西干 姓朴 卵生 年十三甲子卽位 理六十年 妃 娥伊英娥英 國號徐羅伐又徐伐 或斯羅 或雞林 一說至脫解王時始置雞林之號 甘露 戊 辰 四 黃龍 壬 申 一 元帝 初元 癸 酉 五 永光 戊 寅 五 高麗 建昭 癸 未 六 甲申築金城 第一 東明王 成帝 甲申立 理十八年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 故河出圖 洛出書 而聖人作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生炎 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自稱白帝子交通而生少昊 簡狄呑卵而生契 姜嫄履跡而生棄 胎孕十四月而生堯 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 儉 立都阿斯逹[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 與堯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 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頂[即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軰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常畧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畧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奇曰地名 臣讃曰 王儉城在樂浪郡 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 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馭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攻殺何...
魏志云 衛滿擊朝鮮 朝鮮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 開國 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遠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據本紀 則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并馬韓而因 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以馬韓爲百濟者 盖誤濫也 麗地自有馬邑山 故名馬 韓也 四夷◎九夷◎九韓◎穢貊 周禮職方氏掌四夷九貊者 東夷之種 即九夷也 三國史云 溟州古穢國 野人耕田 得穢王印獻之◎又春州古牛首州古貊國 又或云今朔州是貊國 或平壤城爲貊國 淮南子注云 東方之夷九種◎論語正義云 九夷者◎一玄菟◎二樂浪◎三高麗◎四滿飾◎五鳧更◎六索家◎七東屠◎八倭人◎九天鄙◎海東安弘記云...
주석 8208건
B.C.206년 한고조 유방(劉邦)에 의해 건국된 나라. B.C.221년 전국(戰國) 시대를 통일한 진(秦)이 15년 만에 무너지면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다투었다. 그 가운데 한(漢)의 유방은 항우(項羽)의 초(楚)와 최후의 쟁패를 벌여 마침내 B.C.202년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통일을 이루었다. 서쪽의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삼았는데 뒷날 동쪽의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은 후한과 대비시켜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이 마련한 문자, 도량형, 군현제, 황제 등을 적절히 활용해 지배 체제를 안정되게 구축함으로써 비교적 오랜 기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제7대 무제(武帝)가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국 가운데 하나. 경주 분지 일대를 근거로 삼은 읍락 국가인 사로국을 모태로 해서 4세기 중엽 진한 동료 국가들의 병합에 성공함으로써 신라란 국가가 출현하였다. 이후 인근 낙동강 유역권의 가야는 물론 7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까지 병합함으로써 통일왕조를 이루었다. 935년 개성 일대를 중심으로 한 고려 왕조에 의해 병합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천년의 역사라 일컫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신라” 참조. ※신라 및 그 왕력에 대해서는 보주 〈신라와 그 왕계〉 참조.
신라의 국가 시조인 동시에 박씨 족단의 시조.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한다. 혁거세나 불구내는 모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서 광명, 즉 빛과 연관된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혁거세왕” 참조.
신라(사실상은 그 모태라 할 사로국) 최초의 지배자 칭호. 거서간은 거슬한(居瑟邯)으로도 표기하였다. 거서간의 간(干)은 뒷날 한(邯)이나 찬(湌)으로도 표기되었는데, 수장(首長)이나 군장(君長)을 뜻하는 북방 계통의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6세기에 정비된 경위(京位) 17등이나 외위(外位) 11등 가운데 최고위에는 모두 간을 어미로 사용한 데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거서나 거슬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에서는 진한의 말로서 임금이나 귀인(貴人)을 부르는 뜻으로 풀이하면서 혁거세에 국한해서만 사용된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본서 왕력편에서는 물론 기이편1 「제2대...
전한 선제의 연호. 선제는 재위 24년 동안 본시(本始, B.C.73~B.C.70), 지절(地節, B.C.69~B.C.66), 원강(元康, B.C.65~B.C.62), 신작(神爵, B.C.61~B.C.58), 오봉(B.C.57~B.C.54), 감로(B.C.53~B.C.50), 황룡(B.C.49) 등 여러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거의 4년마다 바꾸었음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본서 왕력편에서는 이미 앞서는 전한의 연호가 있음에도 오봉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혁거세가 즉위한 갑자년에 맞추려 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