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00-001]전한(前漢)
B.C.206년 한고조 유방(劉邦)에 의해 건국된 나라. B.C.221년 전국(戰國) 시대를 통일한 진(秦)이 15년 만에 무너지면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다투었다. 그 가운데 한(漢)의 유방은 항우(項羽)의 초(楚)와 최후의 쟁패를 벌여 마침내 B.C.202년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통일을 이루었다. 서쪽의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삼았는데 뒷날 동쪽의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은 후한과 대비시켜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이 마련한 문자, 도량형, 군현제, 황제 등을 적절히 활용해 지배 체제를 안정되게 구축함으로써 비교적 오랜 기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제7대 무제(武帝)가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내세움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 공통하는 문화적 기반이 갖추어졌다. 그 결과 중국 문화의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흔히 한민족, 한문화란 표현이 널리 일반화되었다. 15대 200여 년간 존속하다가 A.D.8년 외척 세력인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해 멸망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낙랑국」조 “전한” 참조.
[A-00-002]신라(新羅)
삼국 가운데 하나. 경주 분지 일대를 근거로 삼은 읍락 국가인 사로국을 모태로 해서 4세기 중엽 진한 동료 국가들의 병합에 성공함으로써 신라란 국가가 출현하였다. 이후 인근 낙동강 유역권의 가야는 물론 7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까지 병합함으로써 통일왕조를 이루었다. 935년 개성 일대를 중심으로 한 고려 왕조에 의해 병합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천년의 역사라 일컫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신라” 참조.
※신라 및 그 왕력에 대해서는 보주 〈신라와 그 왕계〉 참조.
[A-00-003]혁거세(赫居世)
신라의 국가 시조인 동시에 박씨 족단의 시조.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한다. 혁거세나 불구내는 모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서 광명, 즉 빛과 연관된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혁거세왕” 참조.
[A-00-004]거서간(居西干)
신라(사실상은 그 모태라 할 사로국) 최초의 지배자 칭호. 거서간은 거슬한(居瑟邯)으로도 표기하였다. 거서간의 간(干)은 뒷날 한(邯)이나 찬(湌)으로도 표기되었는데, 수장(首長)이나 군장(君長)을 뜻하는 북방 계통의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6세기에 정비된 경위(京位) 17등이나 외위(外位) 11등 가운데 최고위에는 모두 간을 어미로 사용한 데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거서나 거슬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에서는 진한의 말로서 임금이나 귀인(貴人)을 부르는 뜻으로 풀이하면서 혁거세에 국한해서만 사용된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본서 왕력편에서는 물론 기이편1 「제2대 남해왕」조에는 남해왕 대에도 거서간이 일시나마 사용된 기록이 보여 차이가 난다.
[A-00-005]오봉(五鳳)
전한 선제의 연호. 선제는 재위 24년 동안 본시(本始, B.C.73~B.C.70), 지절(地節, B.C.69~B.C.66), 원강(元康, B.C.65~B.C.62), 신작(神爵, B.C.61~B.C.58), 오봉(B.C.57~B.C.54), 감로(B.C.53~B.C.50), 황룡(B.C.49) 등 여러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거의 4년마다 바꾸었음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본서 왕력편에서는 이미 앞서는 전한의 연호가 있음에도 오봉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혁거세가 즉위한 갑자년에 맞추려 하였기 때문이다.
[A-00-006]갑자 4
갑자년은 해당 오봉 연호의 첫해에 해당하며, 4는 오봉이 사용된 기간이 4년임을 나타낸다. 이하는 모두 같은 방식이다.
[A-00-007]성(姓)
원래 중국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8년조에 성(姓)은 모계 혈연을, 씨(氏)는 거주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구별해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 이후 양자의 구별이 차츰 없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으로 삼국 시대부터 성씨가 사용되었으나 애초부터 양자를 확연히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흔히 성씨라고 표현한다. 신라의 경우 성씨가 사용된 확실한 시점은 6세기 중엽 진흥왕 대로서 그중 왕성(王姓)인 김(金)씨가 최초이다. 이후 박(朴), 석(昔), 설(薛) 등의 성씨가 출현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초기 기록에 보이는 박, 석, 김 3성은 모두 후대의 부회에 의해 소급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A-00-008]박(朴)씨
신라 건국자인 혁거세 족단의 성씨.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 최초의 성씨가 되는 셈이다. 다만 기록상 확실한 박씨 성은 7세기부터 확인된다. 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모습이 표주박[호(瓠)]과 닮아 박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의 혁거세왕은 그 일명인 불구내왕에서 비롯하였다는 설도 있다.
[A-00-009]갑자년
갑자는 60개로 이루어진 연(年)간지 가운데 처음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혁거세의 즉위년을 갑자년으로 삼은 것은 뒷날 신라의 건국 기년을 고구려와 백제보다 앞세우기 위해 이때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올렸다고 봄이 일반적이다. 한편 혁거세의 재위 기간을 60년이라 하였으나 본서 기이편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에는 61년으로 되어 있어 1년씩 차이를 보인다. 이는 즉위년 칭원법, 유년 칭원법, 유월 칭원법 등 기록마다 기년법이 달랐던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월성(月城) 「삼국사기」는 유월 칭원법을 취하고 있다. 이하 왕력과 여타 기록들은 1년씩의 편차가 보인다.
[A-00-010]아이영(娥伊英), 아영(娥英)
신라 혁거세왕의 왕비 이름인 알영(閼英)의 다른 표기. 혁거세가 나정(蘿井)에서 태어나던 날 사량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 또는 아리영정(峨利英井) 가에서 계룡(鷄龍)의 왼쪽 갈비로부터 계집애가 나왔는데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 월성의 북편 발천(撥川)에서 목욕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태어난 곳을 근거로 이름을 지었다. 혁거세가 재위 5년째 되던 해(B.C.53)에 알영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 “알영부인” 참조.
[A-00-011]국호
국호는 한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주요 표징이었다. 소속 구성원들은 그와 같은 국호 아래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일체감과 함께 운명 공동체로서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기 마련이었다. 국호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정치·사회적 변동에 따라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한층 세련된 표현으로 고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시대 사정과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국호의 의미와 변경을 특정 국가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주는 주요한 단서로 삼기도 한다. 신라 국호의 변경도 그런 실상을 잘 보여주는 용례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A-00-012]서라벌(徐羅伐)
서벌, 사로, 사라라고도 표기한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경주 분지에 위치하여 뒷날 4세기에 출범하는 영역 국가인 신라의 모태가 된 초기 읍락 국가인 사로국의 국명에서 비롯한 이표기이다. 이들은 곧 경주 분지 일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하고 신라 국가의 왕경으로 전화하였다. 이후 한자인 ‘경(京)’을 서울이라고 훈독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서라벌” 참조.
[A-00-013]계림(鷄林)
세기 이후 신라의 왕실을 배출한 김씨 족단의 본거지이다. 원래는 시림(始林)이라고 불렸는데 거기에서 알지가 닭의 울음소리를 신호로 해서 탄생하게 됨으로써 계림이라고 고쳐 불렀다. 계림은 뒷날 김씨 족단이 왕위에 올라 승계시켜 감으로써 국호의 별칭으로까지 확대 사용되었다. 다만, 여러 국호에 담긴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나 용도는 달랐다. 자세한 사항은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계림” 참조
[A-00-014]탈해왕(脫解王)
탈해이사금이라고도 한다. 신라 제4대 왕. 석씨 족단의 시조이다. 탄생 및 신라 진출의 설화를 매개로 살피면 탈해는 외부 세계에서 태어나 발달한 철기 문화와 같은 선진 문물을 보유하고서 동해 연안을 거쳐 경주 분지로 진출해 마침내 패자가 되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바다를 통해 진출한 만큼 해양 활동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야장으로 월성을 빼앗는 설화로 미루어 흔히 발달한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보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탈해왕” 참조.
[A-00-015]고려(高麗)
고구려의 몇몇 국명 표기 가운데 하나. 오래도록 고구려를 사용하였으나 장수왕 대 무렵인 5세기 후반 고려로 고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일관되게 고구려로 통일되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와 고려가 마구 뒤섞여 사용되는 특징을 보인다.
고구려는 구려, 고려 등 여러 형태로 불렸다. 때로는 중국 측에서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 여하에 따라 그 가운데 구, 려란 글자 각각에 대해 구(狗), 려(驪) 등 대체로 비칭(卑稱) 용도의 동물을 의도적으로 골라서 사용해 폄하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은 고구려를 낮추려는 의도에서 고(高) 대신 하(下)를 사용해 하구려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려도 고구려를 줄인 마치 단순한 약칭인 듯이 여기는 경향이 강하였다. 「삼국지」 고구려조에 의하면 구려(句麗)는 원래 성이란 뜻이었으므로 고(高)는 단지 높은 곳에 위치한 왕성임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풀이된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단순히 지명으로서 늦어도 B.C.2세기부터 사용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근자에 중국측 문헌 분석을 통해 장수왕 대 후반 무렵 고구려가 정식으로 국호를 고려라고 고친 사실이 밝혀졌다.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고구려비」나 6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가칠년명불상명」 등 당대 금석문들에서 고려란 국호가 사용된 데서 그런 사실이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편찬 당시의 고려 왕조와 구별 짓기 위해서 관련 기록 일체를 모두 고구려로 통일하였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원전의 고려를 상당 부분 고구려로 고치기도 하였으나 그대로 둔 부분도 적지 않아 세심히 주의해서 살피지 않으면 자칫 혼란을 불러올 소지도 엿보인다. 고구려를 고려로 고친 사실은 당대 금석문의 절대연대를 판별하는 데에 주요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뒷날 왕건(王建)이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도 막연하게 고구려를 계승하려 하였다는 기왕의 풀이를 뛰어넘어서 그 자체 고구려의 부활이란 뜻을 내재한 사실로서 재음미해 필요가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 “고구려” 참조.
[A-00-016]동명왕(東明王)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시호.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등 5세기에 작성된 금석문 자료에는 대체로 시호는 사용하지 않고 추모왕(鄒牟王)이란 생존 당시의 왕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후한 대의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이나 서진 대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등에서는 동명왕이 부여의 시조 이름으로도 되어 있다. 이는 동북아시아에서 태양 숭배와 연관 지어 동명(성)왕이 널리 공통적으로 사용된 왕명이었음을 시사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 “동명성왕” 참조.
[A-00-017]갑신년
왕력편 작성상의 주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 금성을 축성한 사실을 각별히 강조하려는 필요성에서 당해년의 연간지를 앞에다 따로 제시하였다. 「삼국유사」 왕력편은 「삼국사기」의 연표를 모범으로 하였는데 그보다 한층 자세하게 기술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 면모를 보인다. 내용 면에서도 나름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간지로 표현한 주요 대상은 대체로 왕성의 축조를 비롯해 천도, 국왕 시해, 축제(築堤), 건원(建元), 국망(國亡) 등 이렇다 할 굵직한 사건·사실들이다.
[A-00-018]금성(金城)
신라 초기의 왕궁 혹은 이로부터 확대된 왕성의 명칭.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37)조에 경성(京城)을 쌓아 이때부터 금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26년(B.C.32)조에서는 금성 안에다 궁실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금성의 구체적인 위치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논란함으로써 현재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고고학적인 흔적도 찾아지지 않는다. 6세기 이후 신라 국가가 국왕을 초월자로 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자 금성은 왕경을 지칭하는 공식적 용어로서 정착되었다. 금성은 서벌, 서라벌로 훈독되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 “금성” 참조.
[A-00-019]고(高)씨
동명왕 이후 고구려 왕실이 사용한 성씨.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조에서는 고씨가 고구려라는 국명에서 비롯한 것이라 풀이하고 있다. 「위서(魏書)」나 「주서(周書)」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사서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중국 기록에서 고씨가 처음 등장하는 사례는 장수왕의 이름인 고련(高璉)이므로 이때부터 성씨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그 이전의 고씨 사용을 일체 부정하려는 견해도 있다. 대신 고구려계인 북연왕(北燕王)이 이보다 앞서 고씨라 칭하였으므로 거꾸로 이로부터 고구려가 고씨를 왕성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그 이전부터 이미 여러 다양한 성씨가 사용되고 있었기에 고씨가 실제로 고구려란 국호에서 비롯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출현 시점을 그처럼 늦추어 보아서는 곤란하다.
[A-00-020]주몽(朱蒙)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원래 이름. 주몽은 원래 부여 계통의 말로서 ‘활을 잘 쏜다’는 뜻인데, 동명왕이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를 잘하였으므로 그처럼 불렸다고 한다. 추몽은 추모(鄒牟), 추몽(鄒朦), 중모(中牟), 도모(都牟), 중해(衆解) 등과 함께 주몽의 또 다른 형식의 표기이다. 당대의 금석문인 「광개토왕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등에서는 모두 공통적으로 추모(鄒牟)라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 “주몽” 참조.
[A-00-021]단군(壇君)
고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왕검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壇君’보다는 ‘檀君’이 올바른 표기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를 단군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계통을 단군조선과 연결시키기 위한 데서 나온 발상으로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특이한 사례이다.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247)조에는 환도성이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으로 함락당해 더 이상 거주가 곤란해진 상황이 되자 따로 평양성을 축조해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때 평양을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었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이로 보면 고려 왕조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고구려를 단군조선과 연결시키려는 의식이 널리 퍼졌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고조선」조 “단군왕검” 참조.
[A-00-022]유리왕(瑠璃王)
고구려 제2대 왕. 시조 동명왕의 아들로서 성은 해씨. 유리(類利), 유류(孺留), 유류(孺留), 누리(累利)로도 표기한다. 「광개토왕비」에는 유류왕(儒留王)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예씨(禮氏)부인, 원비(元妃)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원비가 일찍 사망하자 골천(鶻川)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雉姬) 두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두 왕비 사이에 벌어진 질투 사건을 겪은 유리왕이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황조가(黃鳥歌)>를 지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신라의 제3대 유리왕(儒理王)과 제14대 유례왕(儒禮王)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온 세상을 뜻하는 ‘누리[세(世)]’에서 비롯한 왕명이라 보고 있다.
[A-00-023]백제(百濟)
삼국 가운데 하나. 기록에 따르면 부여족 계통의 온조에 의해 기원전 18년에 건국되고 660년 나당연합 세력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678년간 존속한 왕조이다. 이후 3년 동안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백제” 참조.
※백제의 왕계와 그 특징에 대해서는 보주 〈백제와 그 왕계〉 참조.
[A-00-024]온조왕(溫祚王)
백제의 시조.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조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이라고 하였다. 한편 졸본부여 사람인 우태(優台)라는 일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 여러 기록에서 온조의 형으로 등장하는 비류(沸流)도 백제 건국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온조” 참조.
[A-00-025]해(解)씨
아버지 동명성왕의 성을 고씨라고 한 반면, 아들인 유리왕은 해씨를 칭하였다. 이후 같은 왕력편에서는 제3대 대무신왕, 제4대 민중왕에 대해서만 해씨임을 밝혀 두고 이후에는 성씨를 따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대무신왕의 장남이자 민중왕의 형으로서 뒤늦게 왕위에 오른 제5대 모본왕의 경우 성씨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이는 단순한 누락일 뿐 해씨였음이 분명하다.
한편,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에서는 시조 동명왕에 대해서만 성씨를 고씨라 하였을 뿐 이후 국왕의 성씨를 따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는 고씨를 왕성이라고 당연시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무신왕을 대해주류(大解朱留), 민중왕을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을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라 하는 등 이런 왕명에 해란 단어가 들어간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이 해씨임을 간접적으로 밝혀 둔 것으로 풀이된다.
해씨는 해부루(解夫婁), 해모수(解慕漱)처럼 원래 부여 왕실의 성씨로서, 태양을 가리키는 ‘해’를 음차(音借)하였음이 분명하다. 거기에는 태양 숭배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도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부여계 일파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낼 의도에서 해를 성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다. 여하튼 유리왕이 부여계로서 뒤늦게 고구려로 들어와 아버지 동명왕을 뒤이어서 즉위한 사실을 그처럼 해씨로 드러내지 않았을까 싶다. 해씨로는 마지막인 모본왕이 신하인 두로(杜魯)에게 죽임을 당한 뒤, 이어서 즉위한 태조왕은 왕계를 달리하여 자신들에게 동명왕 직계의 정통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고씨를 표방한 것이 아닐까 싶다.
[A-00-026]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또는 둘째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동명왕의 아들로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외에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와 그의 형인 비류 등의 이름이 보인다. 온조를 동명왕의 셋째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한편 둘째라고 한 것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인 비류만을 형으로 헤아린 까닭이다. 그와는 달리 6세기에 편찬된 「위서」 권100 고구려전에서는 따로 여달(閭達)이란 인물이 주몽을 뒤이어서 즉위하였다고 한다. 여달과 유리왕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아 고구려 왕계가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 “온조” 참조.
[A-00-027]재위하였다.
왕력편의 다른 곳에서는 ‘리(理)’나 ‘치(治)’를 섞어서 사용하였으나, 여기에서만 유독 ‘재위’란 단어가 동원되었다. 어떤 특별한 의미가 깃들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A-00-028]위례성(慰禮城)
백제 건국 초기의 도읍. 구체적인 위치를 놓고 직산(稷山), 한강 북안(北岸)과 남쪽의 송파구 일대로 보는 등 여러 의견으로 엇갈려 논란이 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위례성” 참조.
[A-00-029]사천(蛇川)
백제 초기의 수도 위례성의 다른 이름. 그 위치에 대해 일부 판본에 따라 직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선초본의 ‘사산’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
[A-00-030]사산(社山)
발음상 사산(蛇山)의 이표기로서 오늘날의 직산. 「삼국사기」 권35 지리지 한주(漢州) 백성군(白城郡)조에 의하면 사산현(蛇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현이었다가 신라로 편입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직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위례성의 실제 위치 여하와는 상관없이 사천은 사산, 즉 직산 부근을 흐르는 어떤 물길로 봄이 적절할 것 같다.
[A-00-031]한산(漢山)
백제의 초기 도읍이 있던 곳.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한산” 참조.
[A-00-032]병진년(B.C.5)에는 ···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백제가 하북의 위례성에서 하남의 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긴 사실을 가리킨다. 하남 위례성은 한성(漢城)이라고 불렸는데 광주, 즉 오늘날 강남 지역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초기 도읍지를 직산 방면으로 봄은 백제의 발전 흐름상으로 미루어 옳지 않다. 마한 연맹체의 맹주였던 목지국(目支國)이 직산에 위치한 사실과 혼동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옮긴 시점에 대해서는 온조왕 13년으로 보는 견해, 비류왕 대로 보는 견해, 초고왕 대로 보는 견해 등으로 엇갈려 있다.
※백제의 천도와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는 보주 백제조 참조.
[A-00-033]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신라 제2대 왕. 박씨이다. 시조 박혁거세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차차웅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성덕왕 대의 인물인 저술가 김대문(金大問)의 견해에 따르면 무당을 뜻한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 “남해거서간” 참조.
[A-00-034]알영(閼英)
신라 혁거세왕의 왕비 이름. 아이영(娥伊英), 아영(娥英)이라고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 “알영부인” 참조.
[A-00-035]운제부인(雲帝夫人)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왕비 .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 “운제부인” 참조.
[A-00-036]유자영(孺子嬰)
전한 선제(宣帝)의 현손(玄孫). 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실세로 부상하여 어린 황제였던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유자영을 황태자로 내세워 섭정하였다. 이때 거섭이란 연호를 2년간 사용하였으나 왕력의 본문에서는 빠져 있다. 바로 뒤이어서 왕망은 가(假)황제라 하면서 초시란 연호를 잠시 사용하였다가, 이듬해 정월 유자영을 폐위시키고 선양의 형식을 빌려 신(新)을 창건한 다음 시건국이란 새로운 연호로 바꾸었다.
[A-00-037]계해년(3)
A.D.3년. 바로 이해에 해당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년조와 같은 책 권37 지리지(4)에도 보인다. 거기에는 겨울 10월에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고서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직전인 A.D. 2년 봄 3월 교사(郊祀)에 쓸 돼지가 도망하자 이를 추적해 국내의 위나암에 이르렀다거나, 같은 해 여름 4월에 왕이 위중(尉中)이란 곳의 숲에서 사냥한 사실 및 9월에 직접 국내 지역으로 가서 지세를 살피고 온 사례 등은 천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 철저하게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다만, 이때의 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A-00-038]국내성(國內城)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압록강 북안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첫 수도는 환인에 있던 졸본(卒本), 즉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홀본(忽本)으로서, 왕성 및 왕궁은 그 서쪽의 산성인 흘승골성(紇升骨城), 곧 현재의 오녀산성(五女山城)에 위치하였다. 국내성은 유리왕 22년(3)부터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성으로 옮길 때까지 도읍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도중에 외침을 받아 일시적으로 다른 몇몇 지역을 임시 피난처로 삼았던 적이 있다. 국내성으로의 천도를 제10대 산상왕 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A-00-039]불이성(不而城)
국내성의 별칭. 국내성을 그처럼 칭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37 지리지(4) 고구려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에 근거한 듯하다. 혹여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군(臨屯郡)의 폐지 후에 두어진 동부도위(東部都尉) 관할의 동해 연안 7현 가운데 하나인 불이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지명일지도 모르겠다.
[A-00-040]신실(新室):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을 무너트리고 세운 왕조인 신(新)을 가리킨다. 그처럼 표현한 데에서 기존 관례에 따라 신을 정통 왕조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왕력편 찬자의 역사 의식이 엿보인다. 왕망은 주(周)나라를 이상적으로 모방하여 토지와 화폐 개혁 등 급진적 시책을 추진하였으나 단명으로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과거 정통의 왕조로서 정당한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A-00-041]대무신왕(大武神王)
고구려 제3대 왕.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는데, 「광개토왕비」에는 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나온다. 이름은 무휼(無恤) 또는 미류(味留)이다. 제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多勿國王)인 송양(松讓)의 딸이다. 유리왕 33년(14) 11세에 총명하고 지략이 있어 태자로 책립되었다고 한다. 4년 뒤인 18년 유리왕의 사망으로 즉위하였다.
[A-00-042]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
신라 제3대 왕. 유리왕(儒理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2대 남해왕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다. 왕비는 일지(日智)갈문왕의 딸 혹은 허루(許婁)갈문왕의 딸이라고도 한다. 남해왕이 죽음에 직면하여 사위인 탈해가 덕망이 있어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함으로써 즉위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3 노례왕」조 “노례왕” 참조.
[A-00-043]사요왕(辭要王)
노례왕의 왕비 아버지. 본서 왕력편의 「파사이질금」조에도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즉위년조에는 노례왕(유리왕)의 왕비를 일지갈문왕의 딸 또는 성이 박씨인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사요왕이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A-00-044]김(金)씨
신라 왕실의 성씨. 본서 왕력편에서 신라 김씨로서 처음 등장하는 사례이다. 김씨 족단의 시조인 알지는 특이하게도 즉위하지 못한 탓에 왕력편에는 등장하지 않아 그 유례와 관련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김씨는 신라의 왕성(王姓)이면서 최초로 사용한 성씨이기도 하다. 기록상으로는 흔히 함께 신라 3성이라 불리는 박(朴), 석(昔)에 이어서 등장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부회일 따름이다.
김씨 족단의 시조는 알지(閼智)이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조에 의하면 탈해왕 재위 9년(65) 왕성인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이란 숲속의 나무에 걸린 금빛 나는 궤짝으로부터 나왔는데 흰색의 닭이 출현을 알렸다고 한다. 알지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짓고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 김씨가 알지에서 시작하였다는 자체는 당시 성씨 사용의 실상으로 미루어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이 또한 당대가 아닌 후대의 부회임이 분명하다.
6세기 초 법흥왕 8년(521)에 중국 남조의 양(梁)에 처음 사신을 보내었는데, 이때 국왕의 성을 모(募), 이름을 진(秦)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법흥왕의 이름인 원종(原宗), 즉 모진(募秦)의 ‘모’를 성으로, ‘진’을 이름으로 본 데서 말미암는다. 이 기록은 신라에서 아직 성이 없었음을 뜻한다. 당시에는 공동체성이 강고하여 6부를 마치 성씨처럼 사용하였다. 이는 6세기의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김씨가 최초로 사용된 사례는 「북제서(北齊書)」 권7 제기(帝紀)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진흥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면서 김진흥이라고 한 것이다. 이때 진흥왕이 자력으로 중국과 동교하면서 처음 성을 사용하였다. 이후 김진평(金眞平), 김선덕(金善德), 김진덕(金眞德) 등의 사례처럼 신라 국왕의 책봉문 속에 보이는데, 이는 김씨 성이 외교적 필요성 때문에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진흥왕 대 무렵부터 김씨가 왕성으로 사용되고 뿌리내려진 듯하다.
하필 김씨가 성으로 사용된 데에는 물론 알지의 탄생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신라에서 황금이 많이 생산되어 특별히 이를 중하게 여긴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은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제품을 통해서 입증되는 사실이다. 이후 상층 귀족들 대부분이 저절로 그를 따라 사용하였다. 다만, 그 이전 김씨와 경쟁해온 다른 족단들은 따로 박, 석 등의 성씨를 창안하였다. 통일기 이후에는 중국 계통의 성씨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A-00-045]이사금(尼師今)
신라 초기의 왕호 가운데 하나. 이질금은 그 이표기(異表記)이다. 제3대 유리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열네 왕이 사용하였다. 원래 제2대 남해왕이 자신의 아들보다 사위인 탈해가 훨씬 덕망이 있음을 알고서 그에게 양위(讓位)하려 하였으나 탈해가 굳이 치아의 개수를 근거로 한 생물학적인 나이를 내세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 유리가 즉위한 데서 이사금이 비롯되었다. 그래서 8세기 성덕왕 대의 저명한 저술가인 김대문(金大問)이 이사금을 ‘치리(齒理)’ 즉 나이 순서를 의미하는 신라어로 풀이하였는데 대체로 연장자로서 지혜롭다는 뜻이다. 탈해가 즉위하지 않은 것은 외래 계통으로서 아직 자신의 기반 자체가 그리 단단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지만 남해왕이 선양하려 한 것은 합의제적으로 운영되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실상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 “이사금” 참조. 링크
[A-00-046]후한(後漢)
전한 경제(景帝)의 6대손인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세운 왕조. 왕망의 신(新)나라가 15년 만인 23년 무너지면서 2년 동안 여러 정치 세력이 난립하는 혼란기를 맞았다가 25년 광무제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전한 왕족의 후예가 그 계승을 표방하였으므로 후한이라 하며 왕도가 동쪽의 낙양(洛陽)에 위치해 동한이라고도 한다. 멸망기에 집권한 동탁(董卓)이 190년 잠시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가 이후 집권한 조조(曹操)가 196년 다시 자신의 고향 허(許) 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다. 광무제 이후 마지막 헌제(獻帝)에 이르기까지 14대에 걸쳐 195년간 존속하였다. 대체로 제4대 화제(和帝) 대부터 황제가 어려서 즉위한 탓에 외척과 환관이 극심하게 발호하여 권력을 농단하는 특징을 보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남대방」조 “후한” 참조.
[A-00-047]민중왕(閔中王)
고구려 제4대 왕. 성은 해씨.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에서는 제3대 대무신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본서 왕력편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이름은 (해)색주이다. 대무신왕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국인들이 그 동생인 색주, 곧 민중왕을 추대하였다고 한다. 당시 아직 왕위 계승에서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지 못하고 형제 상속제의 유제가 강하게 작용하던 실상을 반영한다. 민중왕은 재위 5년째인 48년 죽음에 직면해 유언을 남기면서 특이하게도 사냥하다가 우연히 찾아낸 석굴에다 장사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석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A-00-048]다루왕(多婁王)
백제 제2대 왕. 시조인 온조왕의 아들로서 성은 부여씨이다. 왕력에서는 온조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에서는 온조왕의 맏아들이라 하였다. 다루왕부터 기루왕과 개루왕까지 이어진 직계를 해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다루왕” 참조.
[A-00-049]가락국(駕洛國)
가야의 여러 나라 가운데 오늘날의 김해에 자리 잡았던 금관국(金官國)의 다른 국명. 삼한 시기에는 구야국(狗邪國)이라고 불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가락국” 참조.
※보주 〈가락국과 그 왕계〉 참조.
[A-00-050]대무신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에 의하면 제3대 대무신왕의 아우로 나온다. 대무신왕에게는 장남으로 해우, 즉 제5대 모본왕이 있었으므로 「삼국사기」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A-00-051]가야(伽耶)
4세기 이후 대체로 낙동강 유역의 서안을 중심으로 위치하여 있던 여러 정치 세력을 총칭해서 부르는 용어. 지역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종족적 기반을 함께함으로써 일체감을 지닌 데서 그처럼 불렸다.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이른바 삼국과 함께 병존하였으나, 여러 개별 국가들이 각기 국명을 갖고 줄곧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분립한 상태로 소멸한 데에 주요한 특징이 있다. 간혹 가야를 하나의 통일된 단일 국가인 듯이 인식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가야를 구성한 나라들은 많을 때는 20여 개였으나 이따금 주변 세력에 합병되기도 하여 시종 일정하지는 않았다. 6세기 초에는 13개로, 6세기 중엽 소멸할 즈음에는 10개까지 줄어들었다. 이들 가운데 금관국, 안라국(安羅國), 가라국(加羅國) 등이 가장 유력·우세하였다.
가야는 매우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이를테면 拘邪, 加耶, 伽耶, 伽倻, 加羅, 迦羅, 加良, 伽洛. 駕洛 등과 같은 사례가 확인된다. 한편 그와는 달리 가야 전 지역을 하나로 묶어 표현한 임나(任那)란 용어도 있다. 이들 용례들 전체를 묶어 분류하면 가야계, 가라계, 임나계의 세 계통으로 정리된다. 이 세 계통은 의미, 성격, 용법, 대상 등에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마구 뒤섞어 사용함으로써 가야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가야란 용어는 김해에 위치한 구야(狗邪)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4세기 가야 사회가 성립하면서 구야국은 가락국, 혹은 금관국이란 국명을 사용하였다. 가라는 가야란 용어에서 비롯하였으나 4세기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국명으로 사용하였다. 임나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다만, 원래 어느 특정한 하나의 국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가야 전체를 하나로 묶은 광역의 의미에서 나온 용어임은 확실하다. 그 속에는 언젠가는 가야가 하나의 통일 국가로 진화해야 한다는 지향과 희구가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임나가 특정 개별 국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그때는 임나가라로 표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상과 같이 가야는 여러 정치 세력이 분립한 상태만큼이나 용법도 매우 복잡하였다. 그럼에도 가야가 마치 하나의 국가였던 듯이 인식하기도 하는 것은 사료의 잔존 형태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의 가야관으로부터 비롯한 바가 크다. 그 가운데 신라본기에서는 가야를 단일한 국가로서 설정하면서 이를 금관국과 등치시켰다. 한편 지리지에서는 가야에 여러 개별 국가가 존재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모순을 보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확인된다. 「삼국유사」의 왕력편과 기이편2에 인용된 「가락국기」는 가야를 김해의 가락국, 즉 금관국으로 정리한 반면, 기이편1의 「오가야」조에서는 7개의 개별 국가가 분립한 상태를 설정함으로써 모순되는 모습을 보인다.
[A-00-052]금주(金州)
고려 시대에 경남 김해를 가리키던 지명. 김해는 원래 금관국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서 532년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으로 편제되었다가 통일기에 이르러서는 금관(소)경으로 승격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가 23년(940) 대대적인 지방 재편 정책을 펼칠 때 김해부로 되었다가 현종 3년(1012) 금주로 바뀌었다. 충선왕 2년(1310)에 김해부로 다시 개편되면서 금주란 지명은 이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A-00-053]수로왕(首露王)
가락국(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에게만 제1이 붙어있지 않은데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의 출현과 관련해서는 구지봉의 건국신화가 남아 있다. 현재 김해 시내에는 수로왕릉으로 전승되어온 무덤도 있다. 이는 물론 당대의 것이 아니며 후대에 부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수로” 참조.
[A-00-054]알로 태어났다.
인간은 포유동물이므로 당연히 새끼로 출생하기 마련이지만 조류처럼 알을 매개로 해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흔히 한 시대를 풍미한 개국 영웅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능력을 보유한 존재라고 여겨서 그처럼 탄생을 신비화시키며 신성시하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웅들을 대상으로 삼은 각종의 탄생 관련 이야기가 신화나 설화적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난생은 특별한 지역적인 구별 없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영웅 탄생 설화의 한 형태이다. 과거 한때 한국 고대사의 뿌리를 남방 문화와 직결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난생을 남방 문화의 특징적 요소라고 각별히 강조해서 주목한 적도 있는데 일찍이 이것이 잘못된 해석임이 밝혀졌다. 부여의 건국자나 고구려의 건국자도 전형적인 난생 인물로서 흔히 태양 숭배와 연관된 것이라 이해되고 있다. 신라의 3성 시조 가운데 박혁거세 및 석탈해, 그리고 금관국의 수로왕도 탄생 지역이나 방식에서는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난생이었다. 단 ‘알’ 자체를 이름으로 가졌으면서도 김알지만은 경주 분지의 시림 숲 금궤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곳에서 이미 알의 형태로 태어났음을 큰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A-00-055]모본왕(慕本王)
고구려 제5대 왕. 성은 해씨, 이름은 해우(애우), 또는 해애루(애류)이다. 왕력편에는 민중왕의 형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모본왕조에서는 대무신왕의 맏아들로 나온다. 그럼에도 모본왕이 민중왕에 앞서 즉위하지 못한 것은 성질이 어질지 못하고 매우 사나웠기 때문이라 하였다. 과연 즉위 후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로부터 크게 원망을 샀다. 마침내 재위 6년째 되던 해(53)에 근신인 두로(杜魯)에게 피살되었다. 모본의 들판에 묻힌 까닭에 시호를 모본왕이라 하였다. 장지를 시호로 삼은 첫 사례이다.
[A-00-056]158년간 다스렸다.
수로왕이 재위하였다는 기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므로 다양한 풀이가 가능한 대상이다. 금관국의 건국 기년을 삼국과 비슷하게 올리기 위한 흔적을 내비친 사례로서, 왕계를 일관되게 부자 계승으로 이어진 것처럼 설정한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는 가락국의 왕계가 실제보다는 뒷날 작성되었음을 방증해준다.
[A-00-057]김(金)씨
금관국(가락국) 왕실의 성씨. 「개황력(開皇曆)」에서는 시조 수로왕이 금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 하였다. 가야의 여러 정치 세력 가운데 특히 금관국은 532년 신라에 자진 투항함으로써 종말을 맞았다. 그래서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과 그 일족의 일부는 신라 골품 체제 속의 진골로 편입되어 왕경으로 이주하고 본국은 식읍으로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신라에서도 아직 성씨를 사용하기 이전으로 이들이 김씨를 성으로 사용한 것은 그 이후라고 봄이 온당하다. 신라가 김씨를 왕성(王姓)으로 삼은 것이 진흥왕 대부터이므로 금관국계도 이를 모방해 김씨라고 칭한 것 같다. 금관국계가 김씨를 사용한 사실을 왕력에서는 금알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적인 부회라고 여겨진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금관국계가 김씨를 표방한 시점은 김유신(金庾信)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이거나 아니면 그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 대부터였으리라 추정된다. 통일기에는 신라 김씨 족단이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중국의 신화상에 등장하는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내세우자 금관국계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이는 바로 이 무렵 세워진 「김유신비」를 통해서 확인된다. 872년의 「황룡사9층목탑사리함기」나 924년의 「봉림사진경대사비(鳳林寺眞鏡大師碑)」 등과 같은 신라 말기의 금석문에 의하면 이 무렵 금관국계의 일부가 스스로를 신(新)김씨라고 표방한 사실도 보인다.
[A-00-058]「개황력(開皇曆)」
금관국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추정된다. 본서 기이편2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 가락국 멸망 기사를 다루면서 「개황록(開皇錄)」이란 서적을 인용하고 있다. 책명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다룬 내용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과 함께 멸망의 문제를 다룬 내용임이 분명하다. 이로 미루어 금관국 역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추정해도 좋을 듯하다. 기왕에 책명에 보이는 ‘개황’이 수나라 문제(文帝)의 연호인 개황(581~600)이라 여겨 바로 이 무렵 쓰였으리라 추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금관국계가 그때 하필 수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할 어떤 절실함이 있었을까. 나아가 그들이 당시 그럴 만큼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당당하게 구축한 상태였을까 등등 몇 가지 측면에서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개황을 수 문제의 연호로 보고 이때에 「개황력」이 작성되었다는 주장에 강한 의문이 뒤따른다. 이후 찬술 시점과 의도 등을 둘러싼 약간의 논란이 벌어졌다. 개황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황실을 열었다’는 의미가 된다. 금관국계가 책명으로 그런 뜻을 내세울 만큼의 상황에 이르려면 적어도 김유신이 맹활약을 보인 시절이나 그 이후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김유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 지대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사후 신라 호국의 천신(天神)이 되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따라서 금관국계의 「개황력(록)」이 그 역사와 관련된다면 편찬에는 김유신의 가계를 현창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갔을 터이므로 이 무렵이라 상정함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를 상한으로 해서 그의 현손인 김장청(金長淸)이 김유신의 일대기인 「행록(行錄)」 10권을 편찬한 시점이거나, 또는 김유신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된 흥덕왕 무렵으로 추정할 여지도 있다. 혹여 늦추어 잡아서 고려 시대 초기 「가락국기」가 편찬된 시기와 연결시켜볼 수도 있겠다.
[A-00-059]국조왕(國祖王)
고구려 제6대 태조왕의 또 다른 시호. 국조왕은 글자 그대로 나라의 할아버지, 나라의 시조란 뜻으로서 고구려사 전반에서 차지하는 태조왕의 위상을 암시해준다.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에서는 태조왕을 표제로 삼았으나, 여기서는 국조왕을 앞세우면서 태조왕을 오히려 일명으로 처리한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같은 책 태조왕 94년조에 인용된 「해동고기(海東古記)」에서도 태조왕이 아닌 국조왕을 내세우고 있다. 관련 사항은 본조 각주 “태조왕” 참조.
[A-00-060]태조왕(太祖王)
고구려 제6대 왕. 국조왕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궁(宮)인데 즉위하기 전에는 어수(於潄)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제2대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이었다고 한다. 모본왕이 피살되고 그의 아들이 불초하여 국인들이 7세인 궁을 즉위시켰는데 태후가 섭정하였다. 이는 그의 즉위 배경이 심상치 않았음을 암시하는데 시호를 태조왕이라고 한 데서도 비슷한 면모가 엿보인다. 태조는 조종지법에 따라 종묘에 올리는 묘호로서 대체로 개국자, 건국자에게 부여한다. 그러므로 제6대 태조왕은 고구려사에서 각별한 위상을 차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국조왕이라고 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태조왕의 즉위는 고구려 초기의 일대 전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A-00-061]「후한전(後漢傳)」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고구려조를 가리킨다. 「후한서」는 남조 송나라의 범엽(范曄)이 지은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총 1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80권의 열전 속에 고구려전과 한전이 들어있다.
[A-00-062]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었다.
이 표현은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그대로 옮겨 온 것으로 후한에서 태조왕 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강한 부정적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는 태조왕 재위 당시 한창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펼쳐 영역을 넓혀 감에 따라 저절로 후한과 크게 대립각을 세워 마찰하던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A-00-063]차대왕(次大王)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차대왕” 참조.
[A-00-064]탈해이질금(脫解尼叱今)
신라 제4대 왕. 석씨 족단의 시조이다. 탄생 및 신라 진출의 설화를 매개로 살피면 탈해는 외부 세계에서 태어나 발달한 철기 문화와 같은 선진 문물을 보유하고서 동해 연안을 거쳐 경주 분지로 진출해 마침내 패자가 되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바다를 통해 진출한 만큼 해양 활동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야장으로 월성을 빼앗는 설화로 미루어 흔히 발달한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보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탈해왕” 참조.
[A-00-065]석(昔)씨
탈해를 시조로 하는 족단의 성씨. 기록 그대로를 따른다면 신라에서 박씨에 바로 뒤이어서 사용된 두 번째 성씨인 셈이다. 탈해를 실은 배가 동해 연안에 나타났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오(鳥)를 제거한 글자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예족(濊族)에서 기원하였으며, 이것이 쇠[철(鐵)]를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
[A-00-066]완하국(琓夏國)
탈해가 신라 동해안으로 들어오기 이전의 원래 출생지로 소개되는 여러 지역의 국가 가운데 하나.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본서 기이편1 「제사탈해왕」조에 탈해의 출신지로서는 그 밖에도 용성국(龍城國), 정명국(正明國) 등이 확인된다. 한편,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조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이라 하였다. 다파나국이 왜의 동북 1천 리라는 기록도 있으나 실제의 대상은 잘 알 수가 없다. 탈해의 출자를 흉노로 보고 그 방면의 국가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려는 견해도 있다. 왜 탈해만이 탄생과 관련한 구체적 국명이 이처럼 많이 등장하는지는 수수께끼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완하국” 참조.
[A-00-067]함달파왕(含達婆王)
완하국의 국왕. 본서 기이편2의 「가락국기」조에서도 탈해왕의 아버지를 완하국의 함달파왕이라 하였는데 왕력편의 내용은 아마도 여기에 근거한 듯하다. 이곳에서만 보이며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함달파” 참조.
[A-00-068]화하국(花夏國)
완하국의 다른 이름. 구체적 위치나 사정은 알 수가 없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화하국” 참조.
[A-00-069]적녀국왕(積女國王)
신라 제4대 탈해왕 어머니의 친정아버지. 여기에만 나올 뿐이어서 적녀국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조에는 단지 여국왕(女國王)으로서만 소개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A-00-070]미소(未召)의 소정구(疎井丘)
탈해의 무덤이 위치한 곳. 탈해왕릉은 현재 소금강산 아래의 석실분으로 지정되어 있다. 미소소정구를 하나로 묶어서 읽을 여지도 엿보이지만 소천구라는 지명이 따로 있으므로 미소의 소정구로 읽는 쪽이 올바를 듯하다. 흔히 미소의 ‘미(未)’도 ‘말(末)’과 자형이 비슷하여 자주 혼용되나 여러모로 미(未)가 옳을 듯하다. 본서 기이편1 「제4 탈해왕」조에서는 탈해의 장지를 소천구(䟽川丘)라고만 하였을 뿐이므로, 미소는 곧 한층 더 넓은 지역이고 소정구는 그 가운데에서 어떤 특정한 위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미소는 물론 소정구도 어디인지 잘 알 수 없다. 제13대 미추왕을 일명 미소라고 한 사실로 미루어 미추왕릉이 있는 곳과 연관될지 모르겠다. 한편,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24년조에는 탈해를 성북(城北)의 양정구(壤井丘)에다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 또한 소정구와 같은 곳을 가리키는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세 기록 모두 우물, 시내[천(川)]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이로부터 탈해를 수장(水葬)하였다는 사실이 만들어졌을 여지도 보인다. 뒷날 문무왕이 말년에 탈해를 동악의 산신으로 모신 점을 고려하면 혹여 수장하였다는 표현도 문무왕의 뼈를 동해안에 수장한 사실을 상기해서 만들어내었을 여지도 엿보인다. 석씨 출신의 국왕 전체 8명 가운데 시조인 탈해의 무덤만이 유일하게 위치가 명시된 사실로 보아 후대, 특히 소상을 만들어 동악산신으로 내세운 결과를 토대로 해서 소급하여 부회하지 않았을까 의심된다.
[A-00-071]수장(水葬)하였다
언덕 위에 조영된 무덤에 어떻게 수장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A-00-072]동악(東岳)
신라 오악의 하나. 신라 왕경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토함산(吐含山)을 가리킨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직후 새로이 편입된 영역 전체를 대상으로 산천제사 일체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제사 체계를 크게 대·중·소사로 등급을 매기고 그 가운데 중사(中祀)의 첫머리에 둔 것이 오악제사이다. 오악제사는 대구의 공산(公山)을 중악으로 해서 사방으로 두드러진 산악을 배치한 것인데, 이때 토함산을 동악으로 삼고 탈해를 그 산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신라 왕경 주변을 대상으로 삼은 오악도 따로 존재하였는데 그 시점을 크게 통일 전으로 보려는 견해와 통일 이후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동악은 두 오악에 모두 동악으로 설정되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4 탈해왕」조 “동악” 참조.
[A-00-073]동악대왕(東岳大王)
토함산의 산신이 된 탈해를 각별하게 지칭한다. 기록상으로 보아 그처럼 동악대왕이라 불린 것은 신라가 아닌 고려 시대의 일이었던 것 같다. 신라 산신 가운데 여성으로 설정된 사례로는 삼산(三山)의 산신을 비롯하여 선도성묘, 치술신모, 운제성모 등이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도 가야의 것이기는 하지만 두드러진 사례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A-00-074]파사이질금(婆娑尼叱今)
신라 제5대 왕. 제3대 유리왕(노례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조에서는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으나, 유리왕의 동생인 나로(奈老)의 아들이라는 이설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탈해가 사망하자 신료들이 유리왕의 큰아들인 일성(逸聖)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였으나 일부가 반발함으로써 파사를 즉위시켰다고 한다. 당시 왕위 계승이 부자 상속은 물론 특정 집단으로 고정되지 않은 시대적인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제2대 남해왕이 사망할 즈음에 왕위를 아들인 유리가 아니라 사위 탈해에게 승계시키려고 시도한 사실이나 유리왕이 굳이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준 사실 등도 마찬가지 양상이다. 선양(禪讓)을 미화하여 이상적으로 생각한 후대의 유교적 의식이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파사이사금 이후에는 다른 족단에게 승계되지 않고 한동안 박씨가 왕위를 이어 나갔다. 파사이사금은 특이하게도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전기 9년조에 박제상(朴堤上)과 관련해서 파사매금(婆娑寐錦)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다만, 박제상의 실제 활동 시기가 눌지왕 대라는 점, 파사의 왕호가 이사금이 아닌 매금(寐錦)인 점 등에서 그 기록에는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보여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A-00-075]기루왕(己婁王)
백제 제3대 왕. 제2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기루왕의 성을 부여씨로 보는 견해도 있고 해씨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루왕 재위 6년(33)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44년 뒤에 다루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A-00-076]사초(史肖)부인
신라 제5대 파사왕의 왕비.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조에서는 파사왕의 왕비를 김씨 사성(史省)부인이라 하였다. ‘소(肖)’와 ‘성(省)’의 자형이 비슷한 데서 비롯한 어느 한편의 착오로서 동일한 인물을 가리키는 듯하다. 왕력편에서는 사초(사성)부인의 혈연관계를 따로 밝혀 두지 않았으나 「삼국사기」에서는 허루(許婁)갈문왕의 딸로 소개되어 있다.
[A-00-077]지마이질금(祗磨尼叱今)
신라 제6대 왕. 성은 박씨이다. 제5대 파사왕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사초부인, 왕비는 마제국왕의 딸 애례(愛禮)부인. 「삼국유사」에서는 지(祗)와 기(祇) 두 글자의 겉모습이 매우 비슷해서 왕왕 혼용하나 왕력편에서는 대체로 기(祇)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祗)가 올바르므로 이것으로 통일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말갈발해」조 “지마왕” 참조.
[A-00-078]마제국왕(磨帝國王)
이 표현만으로 보면 마치 마제국의 국왕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다른 기록과 아울러서 살피면 마제가 인명임이 확실하므로 찬자가 약간의 착각을 범한 것 같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즉위년조에 의하면 마제(摩帝)는 허루(許婁)란 인물과 함께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인 한기부 소속의 이찬(伊湌)으로서, 각기 집단을 대표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관계였다. 제5대 파사왕이 한기부에 행차하였다가 마제의 딸을 만나보고 데려다 태자인 지마의 배필로 삼았다. 이후 지마가 즉위하자 마제는 왕비의 아버지 자격으로 갈문왕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마제국왕이란 곧 마제가 갈문왕임을 가리키는 셈이다. 한편 마제와 경쟁하던 허루는 대신 이찬보다 한 등급 높은 주다(酒多)란 위호를 받았는데 이는 뒷날 각간(角干)이라 불렸다. 그 뒤 허루 역시도 파사왕 왕비의 아버지 자격으로 갈문왕에 추봉되었다.
※ <신라의 관등> 관등이란 관료 조직상에서 관인(官人)이 차지하는 서열상의 위치를 나타내는 등급을 의미한다. 관위(官位), 또는 관계(官階)라고도 하는데 고려와 조선 시대의 관품(官品)에 해당한다.
[A-00-079]음즙벌국(音汁只國)
음즙벌국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읍락 국가. 「삼국사기」 권34 지리지(1) 양주 의창군조에 의하면 제5대 파사왕 대에 음즙벌국을 빼앗아 음즙화현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안강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같은 책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23년(102)조에는 음즙벌국이 강원도 삼척에 위치한 실직곡국(悉直谷國)과 영토의 경계를 다툰 사실이 보인다. 이에 파사왕이 해상 활동에 정통한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빙해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는 음즙벌국이 바다와 밀접히 연관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경역이 흥해(興海) 지역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는 새로운 견해의 단서로서 활용되었다. 지리지 기사에서 음즙벌국이 신라 때 현으로 편제되었다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안강현으로 편입된 사실을 상기하면 오히려 음즙벌국의 원래 위치가 안강이 아니라 흥해 방면일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A-00-080]안강(安康)
현재 경북 경주시 안강읍. 신라 시대에는 흥해에 군치를 둔 퇴화군(退火郡) 소속의 비화현(比火縣)이었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대에 퇴화군을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칠 때 함께 안강현(安康縣)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A-00-081]압독국(押督國)
경산시 압량면에 정치적 중심지를 두고 있던 초기 읍락 국가의 이름. 압량국(押梁國)이라고도 표기하였다. 량과 독은 같이 닭의 뜻이다. 본 왕력편에서는 압독국이 음즙벌국과 함께 신라에 복속 당하였다고 하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23년(102)조에는 이때에 삼척의 실직국(悉直國)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대체로 「삼국사기」가 옳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직국은 그로부터 바로 2년 뒤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였고, 압독국은 일성이사금 13년(146) 반란하였다가 진압되어 그 무리들이 남쪽으로 사민 당함으로써 세력 기반의 교체가 뒤따랐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4 의해 제5 「원효불기」조 “압량군” 참조.
[A-00-082]장산(章山)
원래는 장(章)이 결락된 상태였으나 압독국의 위치를 근거로 해서 보입. 경(慶)으로 보입한 견해도 있으나 경산(慶山)은 고려 말기의 지명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양(梁)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으나 양산은 압량국(압독국)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적절하지 않다. 장산은 오늘날 경북 경산시(慶山市). 신라에 병합되어 압량군이 되었는데, 제35대 경덕왕 대에는 장산군(獐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장산군(章山郡)으로 표기를 바꾸었다가 충선왕이 즉위하던 1309년 피휘(避諱)해서 경산으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4 의해 제5 「원효불기」조 “장산군” 참조.
[A-00-083]일성이질금(逸聖尼叱今)
신라 제7대 왕. 성은 박씨. 왕력편에서는 일성왕의 아버지가 제3대 유리왕(노례왕)의 형이라는 설과 제6대 지마왕이라는 설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유리왕의 맏아들로서 태자였다는 설과 일지갈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특히 유리왕의 태자이면서도 즉위하지 못한 것은 위엄과 덕망이 둘째인 파사에게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떻든 일성은 박씨 왕계에 속하면서 출자나 즉위에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A-00-084]개루왕(蓋婁王)
백제 제4대 왕. 기루왕의 아들로서 성품이 매우 공손하고 몸가짐이 발랐다고 한다.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의 일명을 개루왕을 닮았다는 뜻에서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계보상으로도 연결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목되어 왔다.
[A-00-085]일지(日知)갈문왕
성은 박씨. 기록상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이다. 계보상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모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즉위년조에는 제3대 유리왕의 왕비 아버지라고 한 반면, 일성이사금 즉위년조에는 일설이기는 하나 일성왕의 아버지로 소개되어 있다. 한편 왕력편에서는 일성왕의 왕비인 ▽례부인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 <갈문왕>
[A-00-086]차대왕(次大王)
고구려 제7대 왕. 이름은 수성. 태조왕의 동복아우로서 즉위할 때의 나이가 이미 78세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서」 권85 고구려전에서는 수성을 태조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삼국지」 권30 고구려전에서는 수성이 빠진 상태에서 백고를 태조왕인 궁의 아들이라고 해서 상당한 착란을 보인다.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에 의하면 태조왕이 재위 80년에 이르렀을 때 수성을 따르는 인물들이 태조왕으로 하여금 양위하도록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후에도 태조왕의 노령으로 말미암아 차기 왕위 계승과 관련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태조왕 재위 94년째 되던 해에 마침내 수성이 반란을 결행하려고 하였다.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의 보고를 받아 그런 실상을 미리 알아차린 태조왕은 스스로 양위한 뒤 별궁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태조왕에게는 막근(莫勤)과 막덕(莫德) 두 아들이 있었다. 차대왕이 즉위한 뒤 막근을 먼저 죽이자 막덕은 이를 보고 자결하였다. 차대왕은 폭정으로 재위 20년째 되던 165년 10월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시해 당하였다. 별궁에 살던 태조왕은 같은 해 3월 자연사하였는데, 「삼국사기」 권26 연표에는 차대왕이 한 달 앞서 2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한편 왕력편의 신대왕조에는 두 왕 모두가 신대왕에게 살해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착란은 왕위 계승에서 국가 형성 초기의 선양 습속이나 형제 상속의 유제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부자 상속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A-00-087]아달라이질금(阿達羅尼叱今)
신라 제8대 왕. 제7대 일성이질금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씨로서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며, 왕비는 제6대 지마왕의 딸 내례(內禮)부인이다. 상고기의 박씨로서는 마지막 왕이다. 신라 말기에 돌출적으로 등장하는 박씨 3왕의 계보를 아달라왕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연오랑세오녀」조 “아달라왕” 참조.
[A-00-088]왜국(倭國)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거서간 때부터 왜가 여러 가지 형식으로 등장한다. 호공(瓠公)처럼 왜의 출신자로서, 또는 변경을 침입하는 세력으로서, 때로는 강화를 요청하는 세력으로 보인다. 이때의 왜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당시 일본 열도가 통일된 단일 국가가 아니라 여러 정치 세력이 분립된 상태였으므로, 이 왜국은 구체적으로 어느 세력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 적지 않게 출몰하는 왜를 일본 열도가 아니라 남해안 여기저기에 살던 주민들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 왜국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왜국” 참조. 일본에 관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성왕」조 “일본” 참조.
[A-00-089]미륵대원(彌勒大院)
사찰의 이름. 단순하게 명칭만을 단서로 삼아 충북 충주시 상모면에 위치한 사찰인 미륵사로 간주하는 견해가 많다. 그렇지만 만약 앞의 왜국과의 관련 사실에 잘못이 없다면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명칭만으로 그곳과 쉽게 연결시키기는 곤란하다. 왜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미륵대원의 위치는 소백산보다는 차라리 동해안 방면에서 찾음이 온당할 듯싶다.
[A-00-090]국조왕의 나이 119세였는데
국조왕, 즉 태조왕이 사망한 시점의 나이. 기록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국조왕은 7세에 즉위하여 94년간 재위하였다고 하므로 차대왕에게 선양할 즈음에는 이미 100세였다. 이후 차대왕 재위 19년간 별궁에 살다가 아우인 신대왕에게 시해당하였는데, 이때의 나이가 119세라고 한다. 그러나 「후한서」에서는 이미 안제(安帝) 건광 원년(121)에 사망하였다고 하여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태조왕의 수명, 재위 기간, 사망, 형제 계승, 시호 등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 논란이 많다.
[A-00-091]두 왕이 모두 새 왕에게 시해 당하였다.
을사년(165)이란 연간지를 따로 앞세워 특기한 것은 찬자가 이 내용을 매우 중시하였음을 뜻한다. 두 왕은 제6대 태조왕(국조왕)과 제7대 차대왕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신대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 사실은 주목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0년(165)조에서 태조왕은 차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별궁에서 20년 동안 지내다가 119세로 자연사하였다고 한 반면, 차대왕은 무도한 탓으로 명림답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여 신대왕이 두 왕을 죽인 것과는 차이가 난다. 왕력편이 어떤 사서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A-00-092]신대왕(新大王)
고구려 제8대 왕. 아버지는 고추가 재사인데, 제6대 태조왕의 막냇동생이다.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백고 또는 백구라 하였다. 제7대 차대왕 재위 기간 동안 폭정의 피해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산골짜기에 숨어서 살았다 한다. 외모가 매우 준수하였으며 특히 차대왕과는 달리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그래서 국인들이 차대왕을 죽인 뒤 맞아들이려 하자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즉위하였다. 즉위할 때의 나이가 이미 77세였으며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로 보면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은 형제 상속이었으며, 나이가 많다거나 오랜 기간 재위한 사실은 여러모로 당시 일반적인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주저된다. 차대왕과 신대왕의 왕위 승계가 정변을 매개로 한 것이어서 형제 상속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이들 세 왕의 왕계나 혈연 계보상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뜻한다. 중국 측 사서인 「삼국지」와 「후한서」에서는 이들이 형제가 아니라 부자 관계로 달리 설정되어 있는데, 그와 관련해 문제가 된다.
[A-00-093]초고왕(肖古王)
백제 제5대 왕. 소고왕(素古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씨로서 제4대 개루왕의 아들이다. 제13대 근초고왕은 ‘초고왕’에다 닮았다는 의미의 ‘근’을 붙인 것으로서, 혈연 계보상의 친연 관계를 보여준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神功紀)조에 백제왕으로서 처음 등장하는 초고왕은 근초고왕이다.
[A-00-094]백고(伯固)
고구려 제8대 신대왕의 원래 이름. 「삼국지」 권30 고구려전에서는 제6대 태조왕인 궁을 뒤이은 인물을 아들 백고라고 하였다. 「후한서」 권85 고구려전에서는 태조왕 궁의 뒤를 이은 인물이 차대왕인 수성이라고 한 대신 백고는 수성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혈연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상 상당한 차이를 보여 논란이 많다.
[A-00-095]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구려 제9대 왕.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하였다.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남무(男武), 또는 이이모(伊夷謨)이다. 다만, 「삼국지」에 따르면 이이모는 제10대 산상왕을 가리키므로 약간의 착란이 보인다.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서 왕비는 제나부(提那部) 출신인 우소(于素)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대왕이 사망하자 나라 사람들이 큰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한 까닭에 대신 이이모를 추대하였다고 한다. 발기는 형으로서 즉위하지 못하게 되자 과거 왕족을 배출한 소노부(消奴部)의 대가(大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 호를 거느리고 요동의 공손(公孫)씨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 자체는 「삼국지」 권30 고구려조에 보이는 기록을 근거로 삼은 듯하다. 비슷한 이야기가 산상왕의 즉위와 관련해서도 보이므로 여기에 상당한 착오가 들어가 있으리라 추정된다. 대체로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이모를 산상왕으로 보고 고국천왕을 후대에 만들어져 삽입한 인물로 보아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고국천왕은 좌물촌(左勿村) 출신의 지방민인 을파소(乙巴素)를 파격적으로 국상에 등용하여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의 확립을 도모함으로써 고구려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A-00-096]남무(男武) 혹은 이모(夷謨)
남무와 이모는 제9대 고국천왕의 원래 이름. 이모는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에 보이는 이이모의 잘못인 듯하다. 다만, 이이모를 고국천왕이 아닌 제10대 산상왕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A-00-097]벌휴이질금(伐休尼叱今)
신라 제9대 왕.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서는 발휘(發暉)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석씨로서 탈해왕의 아들인 각간 구추(仇鄒)이며, 어머니는 지진내례(只珍內禮)부인이다. 박씨인 제8대 아달왕에게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자연 현상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각별한 혜안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 탈해왕이 사망한 시점이 80년이고 손자 벌휴왕이 즉위한 해가 184년으로 조손(祖孫) 간의 사이가 100년 이상에 이르는 점, 재위 기간 동안 탈해왕 대와는 달리 주로 북쪽 소백산맥 방면에서 백제와 치열하게 영역을 다툰 점, 특별히 성인으로 내세워진 점 등으로 미루어 같은 석씨라도 탈해와는 계통을 달리한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바로 이때 박씨의 왕계가 끝나고 석씨로 옮겨 간 점도 그런 사정과 연관 지어 이해하기도 한다.
[A-00-098]국천(國川)은 국양(國壤)
국천, 국양의 ‘국’은 당시 고구려 수도로서 평지성인 국내성을 가리키는 듯하며, ‘양’은 땅이란 뜻이므로 어떤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국양을 국천이라고도 한 사실은 그 인근에 시내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고국천왕이란 시호는 국천에 바로 맞닿아 무덤을 조영한 데서 비롯하였을 터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고국천이라 하였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도 비슷한 지역에다 무덤을 조영하였으나 양자의 시호를 구별하기 위해 그처럼 다른 표현으로 나타내게 된 것 같다. 다만, 이들은 원래 각기 국천왕, 국양왕으로 불렸을 듯하나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뒤 무덤이 옛 수도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존 시호에다 의도적으로 ‘고(故)’를 넣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A-00-099]장지(葬地)의 이름
백제나 신라 등 인접국과 견주어 고구려 시호에 내재된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어떤 특정 시기에 장지를 이용해서 시호를 지은 경우가 많은 점이다. 장지를 활용해 시호를 지은 첫 사례는 모본왕이지만, 제9대 고국천왕부터 제18대 고국양왕에 이르기까지 열 명의 국왕에 대해서는 거의 예외 없이 장지로 시호를 짓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다가 제19대 광개토왕 대에는 한동안 국왕 재위 시의 업적을 비롯한 특성을 갖고서 시호를 짓는 추세로 바뀌었다. 이런 조치는 광개토왕이 사망한 뒤 기존 수묘제(守墓制)의 근본적 개편과 맞물려서 추진된 일종의 혁신적 시책에서 비롯한 일로 여겨진다.
[A-00-100]나해이질금(奈解尼叱今)
신라 제10대 왕. 성은 석씨이다. 제9대 벌휴왕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이매(伊買),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다. 왕비는 제11대 조분왕의 여동생이라 하는데 두 사람은 사촌 사이이다. 평소 용모가 빼어나고 재주도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제9대 벌휴왕에게는 장남인 골정(骨正)과 차남인 이매 두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였고, 골정갈문왕의 아들로서 태손(太孫)인 조분이 있었으나 아직 어렸으므로 나해가 즉위하였다고 한다.
[A-00-101]산상왕(山上王)
고구려 제10대 왕. 이름은 연우(延優) 또는 위궁(位宮), 또는 이이모이다. 위궁은 태조왕과 비슷하게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위’가 닮았다는 뜻이므로 증조부 ‘궁’을 닮았다는 뜻에서 위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지」에 보이는 위궁을 산상왕이 아닌 제11대 동천왕(東川王)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산상왕은 고국천왕의 아우로서 즉위하였다지만 순조로운 과정을 밟았던 것은 아니다. 고국천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연우가 왕비인 우씨(于氏)의 도움을 얻어서 형인 발기(發岐)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이에 반발한 발기는 요동의 공손씨 세력에게 나아가 병력을 빌려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해 자결하였다. 산상왕의 즉위 과정이나 발기의 이름 등이 고국천왕 대의 사실과 기록상 뒤섞여 상당한 착란이 보이므로 후자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전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동이 스며들어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고국천왕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해서는 곤란할 듯하다.
[A-00-102]구수왕(仇首王)
백제 제6대 왕. 재위 214∼234. 초고왕의 아들로서 성은 부여씨이다. 귀수왕(貴須王)이라고도 한다. 제14대 근구수왕은 거기에다 ‘근’을 붙여서 왕명을 나타낸 것으로 양자의 친연 관계를 보여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구수왕” 참조.
[A-00-103]거등왕(居登王)
가락국 제2대 왕.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수로왕, 어머니는 허황후이다. 왕비는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허황후를 시종해서 함께 왔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慕貞)이다. 다만, 모정은 「가락국기」 본문에서는 신보의 부인으로도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A-00-104]허황후(許皇后)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 원래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허(許)는 성씨이다. 허왕후가 아니라 허황후라고 한 것은 수로왕을 황제라고 인식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서 「개황록(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후는 본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였는데 16세 되던 때에 부모의 꿈에 하늘의 상제가 현몽해서 수로왕의 배필이 되도록 점지하였다. 이에 신보(申輔)와 조광(趙匡) 등의 시종을 비롯한 20여 명과 함께 각종 보물을 배에 실어서 바다에 띄워 인연이 닿는 곳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수로 역시 하늘의 뜻을 받아서 배필이 외부 세계로부터 올 것임을 예상하고서 기다렸다가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이 자체는 후대에 정리된 설화이므로 당연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가락국이 바다를 주요 수단으로 삼아 바깥 세계와 교류하면서 특정 지역 세력과 혼인 등을 통해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해주는 설화라 하겠다. 「가락국기」에는 이보다 조금 앞서 수로왕이 바다를 통해 가락국으로 진입해 왕위를 노리는 석탈해와 변신술로써 다툼을 벌여 물리쳤다는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이 또한 가락국이 바다를 통해 다양한 세력과 접촉한 사실을 방증해주는 사례이다. 아유타국을 인도, 태국, 남중국 등으로 비정하고서 기록대로 허황후가 실제로 그런 지역 출신이라고 받아들이려는 견해도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허왕후” 참조.
[A-00-105]55년간
제2대 거등왕의 재위 기간. 아들인 제3대 마품왕이 즉위한 기묘년(259)과 관련지으면 거등왕의 재위 기간은 61년이 된다. 「가락국기」에 기록된 39년간 재위한 사실과도 차이가 난다. 왕력편에 소개된 가락국의 왕계와 내용은 거의 모두 고려 시대에 정리된 「가락국기」에 의거하여 작성된 것 같다. 한문식의 왕명은 물론 재위 기간이나 하나의 예외적 사례도 없는 부자 계승 등은 가락국의 왕계를 당대의 기록으로 간주하기 곤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A-00-106]조위(曹魏)
후한을 뒤이은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가운데 정통성을 표방한 왕조. 후한 말 군웅이 할거할 때 승상에 오른 조조(曹操)는 실권을 가졌지만 즉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20년 조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뒤를 이으면서 헌제(獻帝)로부터 양위 받는 형식으로 즉위해서 위를 건국하였다. 사실상 이로써 삼국이 정립한 셈이었다. 전국(戰國)시대 이후 위의 국명이 여럿 나왔으므로 이들과 구별하여 흔히 조위라 일컫고 있다. 위는 263년 촉을 병합하였으나 오는 끝내 병합하지 못하였다. 5대 45년간 존속하였으나 265년 권신인 진왕(晉王) 사마염이 황제를 폐위하고 즉위해 진을 건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남대방」조 “조위” 참조.
[A-00-107]조분이질금(助賁尼叱今)
신라 제11대 왕. 성은 석씨이며 제분(諸賁)이라고도 하였다. 제9대 벌휴왕의 손자이며, 제10대 나해왕과는 사촌 간이다. 아버지는 골정갈문왕(조분의 동생으로서 뒤이어 즉위한 제11대 첨해왕이 재위 원년(247)에 아버지 골정을 추봉해 세신(世神)갈문왕이라고 하였으므로 사실상 조분왕 대에 골정은 아직 갈문왕이 아니었던 셈이다.)이며, 어머니는 김씨인 구도갈문왕의 딸로서 옥모(玉帽)부인이다. 왕비는 아이혜(阿爾兮)부인인데, 제10대 나해왕의 딸이다. 나해왕이 죽기 직전 유언하여, 조분에게 자신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A-00-108]동천왕(東川王)
고구려 제11대 왕. 동양왕(東壤王)이라고도 한다. 양자는 천과 양이 같은 데서 비롯한 동명의 이표기인 셈이다. 제10대 산상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나 어릴 때는 교체(郊彘)라고 불렸다. 「삼국지」에 보이는 위궁이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산상왕에게는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빌었는데, 천신의 현몽(現夢)으로 재위 12년(208)째 되던 해에 주통촌(酒桶村)의 젊은 여인과 관계해서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교체였다. 217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0년 만인 227년 아버지 산상왕의 뒤를 이었다.
[A-00-109]사반왕(沙伴王)
백제 제7대 왕. 제6대 구수왕의 장남으로 성은 부여씨이다. 사비왕(沙沸王) 또는 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 구수왕의 뒤를 이었으나 어렸던 까닭에 정치를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워서 즉각 폐위되었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즉위년조에는 어린 탓에 정사를 맡기 곤란해 즉위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왕력의 내용은 「삼국사기」가 사반왕본기를 따로 설정하지 않아 재위 대수로 헤아리지 않은 사실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이후 백제의 왕계가 초고계로부터 고이계로 넘어간 사실로 미루어 왕위 계승상에서 빚어진 근본적인 문제를 내재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
[A-00-110]제왕(齊王)
조위의 제3대 황제. 사마씨에 의해 폐위되어 원래의 봉호인 소왕이라고 하였는데, 서진 건국 이후 다시 소릉공(昭陵公)으로 낮추어졌다. 소(少)황제 또는 폐(廢)황제라고도 한다.
[A-00-111]첨해이질금(沾解尼叱今)
신라 제12대 왕. 점해왕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씨로 제11대 조분왕의 동복아우이다. 아버지는 제9대 벌휴왕의 장남인 골정(骨正)갈문왕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명을 첨해라 하고 왕력편에서도 일명이 점해라 하였으므로 이해를 첨해의 잘못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해가 첨해의 단순한 이표기인지 아니면 이칭일지 쉽게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미추왕 죽엽군」조 “첨해” 참조.
[A-00-112]중천왕(中川王)
고구려 제12대 왕. 중양왕(中壤王)이라고도 한다. 천과 양이 같은 대상을 가리킴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제11대 동천왕의 맏아들로서 성이 고씨이며 이름은 연불(延弗)이다. 동천왕 17년(24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였다. 즉위하던 해 10월에 연나부(掾那部) 출신의 연(掾)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연나부는 절노부(絶奴部)라고도 하는데 5부 가운데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였다. 왕의 두 아우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가 그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11월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 당하였다.
[A-00-113]고이왕(古尒王)
백제 제8대 왕. 제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성은 부여씨이다. 일반적으로 내부의 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재정비하는 등 상당한 치적을 쌓은 왕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버지 개루왕과는 활동이 100여 년의 시차를 보이는 점,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개루왕의 둘째로서 첫째인 초고왕계의 사반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점 등으로 미루어 고이왕의 즉위를 왕실의 교체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고이왕” 참조.
[A-00-114]초고(肖古)의 아우[모제(母弟)]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우란 뜻이지만, 그럴 경우에는 대체로 동모제(同母弟)라고 표현하여 이모제(異母弟)와 뚜렷이 구분함이 일반적이다. 모제가 동모제와 단순히 표현만 다를 뿐인지 아니면 그 속에 왕실 내부의 교체와 같은 다른 의미를 내재한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A-00-115]점해왕(詀解王)
이해왕, 또는 첨해왕의 다른 이름. 「삼국사기」에서는 첨해왕(沾解王)이라고도 하여 차이를 보인다.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라 여겨진다. 후자를 올바른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A-00-116]고구려와 통교하였다.
신라가 고구려와 처음으로 우호 관계를 맺은 기사로서 주목해 볼 대상이다. 이 내용에 상응하는 기사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2년(248)조에 보인다. 그에 앞서 첨해이사금 16년(245)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매 당대의 명장인 석우로(昔于老)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한 사실이 보이는데, 이 사건과 관련 있는 듯하다.
[A-00-117]고귀향공(高貴鄕公)
조위 제4대 황제. 당시 사마씨가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대립·갈등하다가 폐위당하였다. 그래서 시호나 묘호가 없어 폐(廢)황제라고도 불렸다. 여기서는 황제가 되기 이전의 원래의 책봉호인 고귀향공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A-00-118]진류왕(陳留王)
조위의 마지막 제5대 황제인 원제(元帝). 폐위당해 진류왕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다가 서진의 혜제 13년(302) 허창(許昌)에서 사망한 뒤 이듬해 원제로 추봉되었다.여기서는 강등된 진류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A-00-119]미추이질금(味鄒尼叱今)
신라 제13대 왕. 성은 김씨로서 미소, 미조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구도(仇道)갈문왕이며, 어머니는 박씨인 이칠(伊柒) 또는 이비(伊非)갈문왕의 딸인 생호(生呼), 또는 술례(述禮)부인이다. 왕비는 제11대 조분왕의 딸로서 석씨 광명(光明)부인이다.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김씨의 시조 혹은 중시조로 여기기도 하였다. 미추왕의 무덤을 시조당(始祖堂)이라 하거나 그의 묘(廟)를 박혁거세의 오릉(五陵) 위에다 두고 대묘(大廟)라 불렀음은 그런 실상을 반영한다. 현재 대릉원 내에는 미추왕릉을 지정된 무덤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미추왕 죽엽군」조 “미추왕” 참조.
[A-00-120]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아버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씨의 시조인 알지의 직계 5세손이다. 아버지는 욱보[(郁甫, 「삼국유사」에서는 욱부(郁部)라고 하였다.]이며, 구도가 박씨인 이칠(伊漆)갈문왕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 미추(味鄒)와 말구(末仇) 그리고 옥모(玉帽)를 낳았다. 옥모는 제11대 조분왕의 어머니이다. 김씨로는 제13대 미추가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김씨 족단 세습체제를 마련한 제17대 나물마립간의 아버지가 둘째인 말구이므로 나물왕은 구도의 손자가 되는 셈이다. 이로 보면 구도는 사실상 김씨 족단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정치사회적 기반을 튼실하게 쌓은 매우 비중 있는 인물임이 유추된다. 그는 제8대 아달라왕 19년(172)에 파진찬으로 발탁되고, 벌휴왕 2년(185)에는 일길찬 구수혜(仇須兮)와 함께 좌우군주(左右軍主)가 되어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벌휴왕 5년(188)에는 모산성(母山城), 6년(189)에는 구양(狗壤)을 대상으로 공격해 오는 백제와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동왕 7년(190)에 부곡성(缶谷城) 방면으로 침공해 오는 백제 대상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일시 부곡성주(缶谷城主)로 강등된 적도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소백산맥 방면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하며 거둔 군공은 여러모로 아들 미추를 즉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미추가 즉위한 이듬해인 263년에 구도는 국왕의 아버지 자격으로서 갈문왕에 추봉되었다. 구도와 미추는 부자 사이임에도 구도의 활동 기간과 미추가 재위한 기간(262~284)이 무려 100년 정도의 시차가 난다. 그래서 초기 기사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간주해 기년을 수정해 보려는 유력한 근거의 하나로 삼으려는 견해도 있다.
[A-00-121]생호(生乎)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어머니. 술례(述禮)라고도 하는데 박씨이다. 아버지가 이비갈문왕이다.
[A-00-122]이비(伊非)갈문왕
박씨이며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외할아버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미추이사금 즉위년조에서는 어머니 박씨의 아버지를 이비가 아닌 이칠(伊漆)이라고 하였는데, 양자는 다른 인물이 아닌 단순한 표기상의 차이로 보인다.
[A-00-123]제분왕(諸賁王)
신라 제11대 조분이사금의 다른 표기. 제귀(諸貴)라고도 한다.
[A-00-124]광명랑(光明嫏)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왕비. 석씨이며 제11대 조분왕의 딸이
다. 광명부인을 왜 광명랑이라 표기하였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A-00-125]서진(西晉)
조위의 권신인 사마염(司馬炎)이 황제를 내쫓고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창건한 왕조. 사마염은 제갈량과 싸운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이다. 4대 52년간 존속하였다. 제2대 혜제(惠帝) 때부터 내부가 문란하여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난 틈을 타 북방의 오호(五胡)가 중원으로 본격 진출하고 마침내 317년 흉노계인 유연(劉淵)이 세운 후조(後趙)에게 멸망당하였다. 뒷날 사마예(司馬睿)가 강남의 건업(建業)에서 재건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해 ‘서진’이라고 부른다.
[A-00-126]마품왕(麻品王)
가락국 제3대 왕. 마품(馬品)이라고도 표기한다.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2대 거등왕이며, 어머니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慕貞)이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好仇)이다. 신보와 조광은 아유타국에서부터 허황후를 시종해 온 인물들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마품왕” 참조.
[A-00-127]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
거등왕의 왕비인 모정의 아버지. 신보는 조광과 함께 허황후를 아유타국에서부터 시종해 온 인물이다. 천부경은 왕력편과 그 근거로 된 「가락국기」에만 나올 뿐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신보가 가락국에서 보유하게 된 관직일 듯하다.
[A-00-128]모정(慕貞)
가락국 제2대 거등왕의 왕비. 「가락국기」에는 그의 어머니 이름도 모정으로 나온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모정” 참조.
[A-00-129]서천왕(西川王)
고구려 제13대 왕. 서양왕(西壤王)이라고도 한다. 이 또한 천과 양이 같은 대상을 가리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제12대 중천왕의 둘째 아들로서 성이 고씨이며, 이름은 약로(藥盧), 혹은 약우(若友)라고도 한다. 중천왕 8년(255)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였다. 재위 2년째인 271년 서부 대사자 우수(于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A-00-130]유례이질금(儒禮尼叱今)
신라 제14대 왕. 성은 박씨이며, 제11대 조분이사금의 아들이다. 제3대 유리왕과 왕명이 비슷한 탓에 실재 여하를 놓고 논란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미추왕 죽엽군」조 “유례왕” 참조.
[A-00-131]책계왕(責稽王)
백제 제9대 왕. 성은 부여씨이며, 제8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청계(靑稽)라고도 한다. 즉위한 뒤 대방왕(帶方王)의 딸인 보과(寶菓)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에 스스로 대방을 장인의 나라로 여겨 평소 각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연합함으로써 자주 공격을 가해 오는 고구려에 맞서 싸웠다. 대방왕의 실체는 뚜렷하지 않으나 대방군 태수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무렵 대방군을 관장한 본토의 서진(西晉)이 8왕의 난 등으로 내부가 혼란해진 틈을 타 태수가 자립을 표방함으로써 마치 독자적인 왕국을 구축한 듯이 비쳐졌을 것으로 보인다. 온조와 비류 외에 또 다른 백제 건국의 시조로서 등장하는 구태(仇台)가 대방고지 출신인 사실도 그런 사정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A-00-132]32년간 다스렸다.
아버지 거등왕이 가평(嘉平) 5년 계유년인 253년에 사망하였음을 고려하면 거등왕의 기묘년 즉위는 잘못이다. 「가락국기」에도 계유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위 기간이 32년이라는 것도 잘못으로서 「가락국기」처럼 39년으로 고쳐야 한다.
[A-00-133]청체(靑替)
제9대 책계왕의 원래 이름. 왕력편에서는 청체를 책계왕의 이름이라 소개하면서도 특이하게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해 두었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에서는 책계왕을 청계(靑稽)라고 표기하였다. 따라서 청계가 아니라 청체라고 하였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청계 자체가 책계왕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A-00-134]세리지왕(世里智王)
유례이질금의 이표기. ‘세’의 훈이 ‘누리’이므로 음차와 훈차 여하에 따른 차이로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미추왕 죽엽군」조 “유례왕” 참조.
[A-00-135]월성(月城)
경주 분지의 중앙부 남쪽 지역을 흐르는 문천(남천)에 면한 토석(土石) 혼축의 성. 고려 후기 무렵에는 모양을 고려해 반월성(半月城)으로도 불렸다. 크기는 동서 890m, 남북 260m, 둘레 2,340m로 현재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쪽은 해자가 둘러쳐져 있고 남쪽은 남천이 자연 해자로 활용되었다. 국왕이 살고 있다는 뜻에서 재성(在城)으로도 불렸는데 성 안에서 ‘재성’명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다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치면서 토석 혼축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을 통해서 늦어도 4세기 후반〜5세기 초 전후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어느 시점부터 멸망할 때까지 신라의 왕궁으로 활용되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다만, 공간이 매우 협소한 탓에 신라 국가가 발전해가면서 왕궁은 월성 주변으로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그래서 왕궁인 월성을 본궁(本宮)이라 부르고 대신 이를 주요 거점으로 해서 외곽으로 늘어난 큰 왕궁을 따로 대궁(大宮)이라고 불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김알지 탈해왕대」조 “월성” 참조.
[A-00-136]봉상왕(烽上王)
고구려 제14대 왕.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성이 고씨,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歃矢婁)이다. 제13대 서천왕의 아들로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공적을 크게 세워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자신의 삼촌 안국군(安國君) 달고(達賈)와 동생인 돌고(咄固)를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재위 9년째 되던 300년 국상(國相)인 창조리(倉租利)가 여러 차례 잘못을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자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모의해서 폐위시켰다. 봉상왕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 자살하였다.
[A-00-137]치갈왕(雉葛王)
고구려 제14대 봉상왕의 또 다른 왕명. 치갈왕의 의미나 왜 그처럼 부르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A-00-138]기림이질금(基臨尼叱今)
신라 제15대 왕. 기립왕(基立王)이라고도 하는데 석씨이다. 왕력편에서는 제11대 조분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10대 나해왕의 딸인 아이혜부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기림이사금 즉위년조에는 아버지가 이찬 걸숙(乞淑)으로서 제11대 조분왕의 손자라 하면서 동시에 걸숙도 조분왕의 손자라는 일설까지 소개함으로써 가계상 상당한 혼동이 빚어지고 있다.
[A-00-139]분서왕(汾西王)
백제 제10대 왕. 제9대 책계왕의 맏아들. 성은 부여씨.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재위 7년째 되던 해(304)에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였다. 분서왕의 외가가 대방군임을 염두에 두면 자립을 추구해 나가면서 빚어진 낙랑군과의 대립·갈등 양상을 반영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A-00-140]거질미왕(居叱彌王)
가락국의 제4대 왕. 금물(今勿)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3대 마품왕, 어머니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이다. 조광은 허황후를 신보와 함께 아유타국에서 시종해 온 인물이다. 왕비는 아간(阿干) 아궁(阿躬)의 손녀인 아지(阿志)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거질미왕” 참조.
[A-00-141]금물(今勿)
가락국 제4대 거즐미왕의 원래 이름.
[A-00-142]호구(好仇)
가락국 제3대 마품왕의 왕비. 제4대 거즐미왕의 어머니이다. 종정감을 지낸 조광의 손녀인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록상 나타나지 않는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호구” 참조.
[A-00-143]기립왕(基立王)
제15대 기림왕의 이표기이다.
[A-00-144]국호(國號)를 정하여 ··· 연결 짓는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기림이사금 10년(307)조에 신라라는 국호를 다시 사용한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기사는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이 지증왕 3년(502)조의 일로 기록되어 있어 약간 문제가 된다. 전반적 사정상 후자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신라 국호의 종류와 의미, 사용 시점 등을 둘러싸고는 논란이 많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신라” 참조.
※ <신라 국호>
신라에서 사용한 국호는 크게 사로(서라벌), 계림, 신라 등 세 계통으로 정리된다. 이들이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용 시점은 물론 내포된 의미 및 성격 등에서도 일정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 국호가 나온 밑바탕에는 시대적 사정이 반영되었다.
사로, 서라벌은 경주 분지를 중심 근거지로 하면서 B.C.2세기 전후 무렵에 출범한 초기 읍락(邑落) 국가인 사로국이란 국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영남권 일원에서는 사로국과 성격 및 규모가 비슷한 읍락 국가들이 각지에 널리 산재한 상태였다. 이들은 이후 내부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4세기에 이르러 정치적 통합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사로국 주축으로 여러 읍락 국가가 병합됨으로써 마침내 새로운 규모와 성격의 국가인 신라로 전환하였다. 말하자면 사로는 큰 영역을 지닌 신라 국가의 핵심적 모태였다.
신라의 출범으로 사로는 사실상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라 할 왕경으로 전화한 셈이었다. 이로써 사로는 신라 국가의 왕경이면서 동시에 그 정도의 경역을 공간적 범위로 삼은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였다. 당시 주변 읍락 국가들의 국명이 모두 각각 신라 영역 내의 지역 명칭으로 뿌리내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흔히 한 국가의 수도를 가리키는 경(京)을 서울이라 훈독함도 바로 사로(서라벌)에서 비롯한 것이다. 6세기에 이르러 신라가 큰 발전을 이루게 되자 유학적 인식을 배경으로 해서 국호를 원래부터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網羅四方)’에서 비롯하였던 듯이 그럴듯하게 포장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사로와는 다르게 왕경을 구심으로 해서 매우 넓은 공간적 영역을 보유한 국명을 뜻한다.
한편 계림은 글자 그대로 닭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여긴 김씨 족단의 본거지를 가리키는 지명인데, 7세기 무렵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명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이는 6부 가운데 하나로서 닭을 의미하는 ‘량(梁)’, ‘탁(喙, 또는 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림 자체가 거기에서 비롯한 한문식 표기인 데서 짐작되듯이 가장 뒤늦게 가장 생겨나 좁은 지역의 의미를 내재한 국호이다. 6세기 이후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 체제가 새롭게 갖추어지고 이와 함께 왕경 의식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사로는 한문식의 금성(金城)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국호로는 신라와 계림만 병용되었고, 사로는 특수한 경우에만 일시적·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식 국호는 어디까지나 신라였으며 계림도 특별한 경우에 한해 별칭으로서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A-00-145]미천왕(美川王)
고구려 제15대 왕. 호양왕(好讓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고씨이며, 원래의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우불(憂弗)이다. 제13대 서천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봉상왕의 동생인 고추가 돌고(咄固)이다. 아버지 돌고가 봉상왕에게 살해당하자 자신에게 위해가 미칠까 두려워 도망해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노동하며 힘들게 살았다. 압록강을 오르내리면서 소금 장사도 하였다.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하기로 결심하면서 미리 사람을 보내 을불을 찾아내어 즉위하도록 하였다.
[A-00-146]호양(好壤)
미천왕의 다른 표기.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조에 호양왕이라 하였다. 이는 지명에서 비롯한 시호로 보이는데 미천왕의 미천과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A-00-147]비류왕(比流王)
백제 제11대 왕. 제6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7대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기 때문에 신하들과 백성들이 다 함께 비류왕을 추대하여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위 시점만을 염두에 두면 아버지 구수왕이 214년, 형인 사반왕이 235년, 비류왕이 304년이므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구수왕의 사망 시점인 235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비류왕은 80세 이상의 고령으로 즉위한 셈이 된다. 그래서 이것이 사실상 왕실이 교체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A-00-148]걸해이질금(乞解尼叱今)
신라 제16대 왕.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에서는 흘해(訖解)로 표기되어 있다. 성은 석씨이며 신라 제10대 나해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각간 석우로(昔于老)이다. 어머니는 제11대 조분왕의 딸로서 명원(命元)부인이다. 우로는 자신의 아들인 흘해가 어릴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역량이 보통 사람을 능가하므로 장차 자신의 집안을 일으킬 재목이 될 것으로 지목하였다. 기림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여러 신하들이 걸해가 아직 어리지만 노덕(老德)이 있었다고 판단해 왕위에 추대하였다고 한다.
[A-00-149]우로음(于老音)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서는 모두 ‘우로’라고 하였으므로, ‘음’은 잘못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다만, 본서 권5 피은편 「물계자」조에 보이는 ‘날음(捺音)’의 ‘날’이 생략되어 우로에 덧붙여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우로는 신라 제10대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다. 맏아들인 이음(利音)이 도중에 사망함에 따라 나해왕이 사위인 조분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겨 우로는 즉위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나해왕은 과거 골정갈문왕의 아들로서 제9대 벌휴왕의 태손(太孫)인 조분이 어려서 대신 즉위하게 되었기에 자신의 아들인 우로가 아닌 사위 조분에게 승계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우로는 이미 아버지 나해왕 대부터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쳐 성공을 거둠으로써 크게 주목을 끌었다. 나해왕 14년(209)에 가라(혹은 안라)가 소위 포상(浦上) 8국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였을 때 이음과 함께 출정해서 막아 주었다. 조분왕 2년(231)에는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는 등의 군공을 세웠다. 조분왕 4년(233)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자 사도성(沙道城)에서 맞서 싸우면서 불을 놓아 배를 태워 몰살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분왕 15년(244)에는 서불한(舒弗邯)이 되어 병마의 일을 맡았으며 이듬해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공하자 나가서 막았다. 첨해왕 대에는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여 백제에 붙었기에 우로가 군사를 동원하여 그를 멸망시켰다. 그러다가 첨해왕 7년(254, 열전과는 달리 신라본기에는 3년이라고 함) 동해 연안에 침범한 왜인과 협상하다가 붙잡혀 불태워져 최후를 맞았다. 미추왕 대에 왜의 사신이 신라에 왔을 때 우로의 처가 꾀어서 집으로 끌어들여 불태워 죽임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우로는 신라 국가 발전기에 엄청난 군공을 세워 한 시대를 풍미한 일세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삼국사기」 열전에도 상고기의 인물로는 드물게 입전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흘해는 이런 아버지의 군공을 배경으로 즉위할 수가 있었다.
[A-00-150]각간(角干)
신라 17관등 가운데 최고위 제1등인 이벌찬(伊伐湌)의 일명. 그 밖에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粲), 서불한(徐弗邯), 서발한(舒發翰), 주다(酒多) 등 여러 이칭이 있다. 다른 관등과는 달리 유난스레 이칭이 많은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최고위 관등의 발생사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뒷날 비상위(非常位)로서 대각간, 태대각간이 두어지는 것을 보면 정식 명칭은 각간으로 정착되어 간 것 같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 법민」조 “각간” 참조.
[A-00-151]이 왕 대에 백제병이 처음으로 공격하였다.
백제가 신라를 처음 공격한 것이 흘해왕 대였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흘해왕 재위 말년에 백제가 침공하였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문장만으로는 전자가 타당한 듯하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백제와의 첫 싸움은 이미 탈해왕 7년(63)부터 보이므로 단정하기 곤란하다. 이때 백제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왕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듬해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한 뒤 이 방면을 둘러싸고 한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후 두 나라가 대체로 변경 지역에서 싸움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때로는 화해해서 우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럴 때 주변의 다른 적대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서로 구원병을 파견해 돕기도 하였다. 그런데 4세기 이전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투 가운데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지명은 대부분 소백산맥 일대여서 약간 문제가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이해는 초기 기록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 놓고 크게 긍정론, 부정론, 수정론으로 나뉘며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각인각설로 종잡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 가운데 소백산맥 일대에서 벌어진 싸움과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은 몇몇 수정론의 입장이다. 당시 그 방면은 아직 완전한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 위치한 정치 세력의 경험이 뒷날 종합 정리되면서 마치 신라가 경험한 사실인 듯이 정리되었다고 보는 견해, 후대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사실이 이때로 소급·부회되었다고 보는 견해, 벌휴왕 계통의 석씨 족단이 남하해 오면서 백제와 접촉해 경험한 사실이 들어간 것이라는 견해, 박씨 족단이나 김씨 족단의 출자를 이 방면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과 연결하려는 견해 등 매우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어 있다.
[A-00-152]동진(東晋)
중원에 위치한 서진이 멸망한 뒤에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가 강남의 건업(建業)에다 317년 세운 새로운 왕조. 강북의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 한다. 제11대 공제(恭帝)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존속하다가 420년 권신인 유유(劉裕)가 황제인 공제를 폐위시키고 송(宋)을 건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난타벽제」조 “동진” 참조.
[A-00-153]중종(中宗)
동진을 건국한 원제(元帝) 사마예의 묘호. 왜 하필 여기서는 시호를 쓰지 않고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A-00-154]현종(顯宗)
현종은 동진의 황제인 성제(成帝)의 묘호. 왜 시호를 쓰지 않고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김부대왕」조 “현종” 참조.
[A-00-155]벽골제(碧骨堤)
저수지의 이름. 연간지를 사용하여 따로 다룬 자체는 왕력의 찬자가 이 못을 매우 중히 여겼음을 뜻한다. 이에 상응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21년(330)조에도 보이는데, 1년간의 시차가 있지만 이는 칭원법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왕력편의 찬자도 바로 그 기사를 활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둘레를 1,800보라고만 한 데에 반해, 왕력편에서는 둘레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수전(水田)의 면적까지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원전을 근거로 삼았을 여지도 엿보인다. 그런데 벽골제라는 같은 이름의 저수지가 현재 전북 김제에서 서해로 나아가는 길목의 평야 지대에 위치한다. 대체로 길이는 3km, 높이는 4.3m로 국내에서 단독 저수지로서는 최대 규모라 하며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벽골제는 발굴을 통해 백제 때 쌓았으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축(補築)·개축(改築)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 권36 지리지 김제군조에는 원래 군명을 백제의 벽골현(碧骨縣)이라 한 데서도 유추된다. 다만, 이미 백제 당대부터 저수지를 현명으로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지명을 근거로 저수지명을 붙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지명의 개칭을 거치면서도 저수지 명칭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왕력편 및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벽골제와의 관련성 여부가 문제 된다. 이들 양자에서는 벽골제가 모두 신라의 저수지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이 신라 영역으로 편입된 시점은 7세기 중엽 백제 멸망 이후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벽골제와는 별도로 신라에도 그런 이름의 저수지가 있었다는 견해, 이 기록 자체가 백제의 것이나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것으로 잘못 들어간 것이라는 견해 등으로 엇갈려 있다. 만약 전자라면 그 구체적 위치를 비정할 수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한 데에 큰 약점이 있다. 후자라면 과연 백제에서 벽골제가 축제된 시점까지 그대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규모 또한 역시 그러하였을지 등등의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 한다. 사실 이 방면이 백제 영역으로 완전히 편입된 시점은 근초고왕 대이며, 그 지역의 농경지가 개발되고 저수지가 축제되기 시작한 시점은 여러모로 6세기 초 무령왕 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해명되어야 할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는 기록이다.
[A-00-156]14,070
여기에는 수전의 단위가 결락되어 있다. 최근 경북 경산의 소월리(所月里)에서 출토된 6세기 말 혹은 7세기 초의 목간을 통해서 당시 신라에서는 결부(結負)를 사용하였음이 확인된 반면, 백제에서는 궁남지 및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된 7세기 초의 목간을 통해 신라와는 다르게 형반제(形半制)가 당시 토지의 단위였음이 드러났다. 이 벽골제가 어느 나라에 속한 저수지인지에 따라 당시 토지의 단위도 결정될 터이다.
[A-00-157]국원왕(國原王)
고구려 제16대 왕. 성은 고씨이며 원래 이름은 사유(斯由) 또는 쇠(釗)로 강상왕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조에는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 하여 고(故)를 붙이기도 하고 떼기도 하였다. 이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던 데서 비롯한 표기 방식으로 보인다. 재위 41년(371)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A-00-158]쇠(釗)
‘쇠(釗)’는 소, 교, 쇠 등 여러 가지로 발음된다. 이름자로는 ‘소’라고 읽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에서는 또 다른 이름인 사유(斯由)를 참고해 쇠라는 발음을 따랐다.
[A-00-159]강상왕(岡上王)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의 다른 이름.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조에는 국강상왕이라 하였다. 앞머리의 국이 실수로 누락된 것인지 국강상왕을 강상왕이라고도 불렀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집안고구려비」에 보이는 왕명의 하나를 국강상태왕(國岡上太王)으로 읽고서 이를 고국원왕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A-00-160]평양성(平壤城)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년(334)조에 이 내용과 상응하는 기사가 보인다. 이때 증축하였다고 한 사실은 이미 평양성 자체가 존재한 상태였음을 뜻한다. 미천왕 3년(302) 현토군을 공격해 8천여 명을 사로잡았을 때 이들을 평양성으로 데려온 사실이 그를 방증한다. 한편, 이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동천왕 18년(244)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 초토화됨으로써 더 이상 도읍으로 사용하기 곤란해지자 이듬해에 평양성을 쌓아 종묘와 사직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때 대동강 유역에는 아직 낙랑군이 건재한 상태였으므로 당시의 평양성을 이곳으로 비정하기는 곤란하다. 고국원왕 12년(342)에 선비족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침범해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시킨 뒤 궁실을 불사르고 성을 헐었으며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과 함께 왕모 주씨(周氏) 왕비와 5만 명의 포로 및 수많은 보물을 거두어서 돌아갔다. 고국원왕은 이듬해에 전연과 화해하였으나 거처를 환도성이 아닌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다고 한다. 「삼국사기」 찬자는 이 동황성을 고려 시대 서경 동쪽의 목멱산(木覓山)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평양인 셈이다. 다만, 그럴 때의 평양 동황성을 427년의 평양성 그 자체로 보기는 어렵겠다. 평양성을 북한산군이라고 한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경기도 양주인 남평양을 가리키는 듯하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보장봉노 보덕이암」조 “평양성” 참조.
[A-00-161]안시성(安市城)
이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환도성이 곧 안시성으로 되는 셈이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의 해당 연도 기사에 따르면 342년 8월 국내성을 쌓고 동시에 환도성을 수리하였다는 사실에 상응하는 것 같으나 여기에는 안시성과 관련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권37 지리지(4)에 안시성을 옛 안시흘(安十(寸?)忽)이라고 하면서 일설로 환도성을 소개한 기록이 보인다. 왕력편의 찬자가 어쩌면 이를 근거로 해서 환도성과 안시성을 동일시하였을 소지가 엿보인다. 안시성은 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독립성을 지켰으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 공격에 나섰을 때 끝내 공략하지 못한 천험의 요새로도 등장한다. 그러나 양자는 위치나 성격상으로 보아 같은 성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동명이성(同名異城)으로 봄이 적절할 듯하다.
[A-00-162]환도성(丸都城)
중국 환인의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 평지의 왕성인 국내성(國內城)과 하나의 세트를 이룬 산성으로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대피처의 용도였다. 국내성으로 천도한 시점은 제2대 유리왕 22년(A.D. 3)으로서 이때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하나 환도성이 바로 이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산상왕 2년(198)에는 환도성을 쌓았으며 13년(209)에는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발기가 형으로서 즉위하지 못해 요동의 공손강에게 나아가 투항하자 동생인 이이모가 즉위하여 다시 나라를 세웠다고 한 삼국지의 기록을 근거로 이때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후 환도성은 파란을 적지 않게 겪었다. 동천왕 20년(246)에는 유주자사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함락당하였다. 이듬해 동해안까지 피란하였던 동천왕이 돌아왔으나 환도성이 거처로서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대신 평양성을 쌓아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국원왕 12년(342) 봄 2월에 다시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은 뒤 8월에는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아마도 이는 모용황의 침입이라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던 듯하다. 과연 바로 그해 11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해 환도성을 함락시켜 성을 헐고 돌아갔다. 이때 단웅곡(斷熊谷)이란 곳으로 일시 피란하였다가 되돌아왔으나 고국원왕은 거처를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겼다.
[A-00-163]계왕(契王)
백제 제12대 왕. 성은 부여씨이다. 제10대 분서왕의 장남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어려서 즉위하지 못하고 대신 비류가 즉위하였다. 제11대 비류왕이 재위 41년 만에 사망하자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이나 계기는 석연하지 않다. 특히 재위 3년째에 사망하고 대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한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이를 왕실이 교체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다.
[A-00-164]효종(孝宗)
효종은 동진 목제(穆帝)의 묘호. 왜 하필 여기서 시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A-00-165]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
신라 제17대 왕. 성은 김씨. 아버지가 말구(末仇) 각간이며, 할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다. 본 왕력편에서는 아버지를 구도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의거해 일설로 소개된 미추왕의 아우 말구를 아버지로 봄이 일반적이다. 구도갈문왕의 첫아들인 제13대 미추왕은 말구의 형으로서 나물왕에게는 백부인 셈이다. 어머니 역시 김씨로서 휴례(休禮)부인. 왕비는 보반(保反) 또는 내례희(內禮希), 내례길포(內禮吉怖)부인으로 미추왕의 딸이다. 나물왕에게 미추왕은 백부이면서 동시에 장인인 셈이다. 미추왕이 김씨로서는 처음 왕위에 올랐으므로 나물왕은 두 번째이다. 나물왕은 백부 미추왕을 승계한 것도 아니고 그 사위의 자격으로서 즉위한 것도 아니었다. 미추왕과의 사이에 석씨가 3대나 이어졌으며 그 마지막인 제16대 흘해왕(訖解王)이 사망하자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흘해왕에게 아들이 없었던 까닭에 나물왕이 뒤를 이었다고 하였으나 이후 김씨의 세습 체제가 확립된 사실로 미루어 그의 즉위 자체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나물왕 대에 여러모로 엄청난 변화가 벌어졌음이 그를 시사한다. 첫째, 왕호가 이사금으로부터 마립간으로 바뀐 사실이다.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과는 달리 마립간은 여러 간(干)들의 우두머리란 뜻으로서 정치적 군장을 뜻한다. 둘째, 나물왕 대에 비록 고구려의 도움을 받았지만 전진(前秦)과 통교해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 신라의 사신 위두(衛頭)와 전진의 국왕 부견(符堅)이 나눈 대화 속에서 명호(名號)를 바꾸는 등 내부적 변동을 크게 겪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셋째, 이때 높고 큰 외형을 가진 고총(高塚)이 경주 분지 중앙부에 등장한다. 적석목곽분이란 특이한 내부 구조를 가진 무덤으로서, 겉모습은 물론 부장품도 그 전과는 질과 양의 두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정치체 자체의 질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이때 읍락 국가인 사로국으로부터 영역 국가인 신라로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흔히 사로 대신 신라라는 새로운 국명이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다고 추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나물왕 김제상」조 “나물왕” 참조.
※ <마립간>
제17대 나물왕부터 이사금을 대신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왕호. 왕호를 바꾼 사실 자체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사회적인 변화가 밑바탕에 깔렸음을 뜻한다. 아마 나물왕 대부터 이후 3성(姓) 교립이 아닌 김씨 단독의 왕위 승계 체계가 마련된 사실은 이를 뚜렷이 입증한다. 다만, 「삼국유사」와는 달리 「삼국사기」에서는 제18대 실성왕 대부터 마립간이란 왕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전자를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후자 속에도 어떤 일정한 의미가 내재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실성왕은 외가가 석씨계인 만큼 즉위 과정에서 나물왕의 아들인 눌지와 대결해서 이제 막 갖추어져 가는 새로운 지배 질서를 거부하고 오히려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는 입장에서 이사금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본서 기이편2 「지철로왕」조에는 마치 지증왕 대부터 마립간이란 왕호가 사용된 듯한 기록도 보이나 이는 명백한 착오이다.
마립간의 마립은 으뜸[종(宗)], 머리[두(頭)], 마루[청(廳)] 등의 음차이므로 마립간은 수장인 간(干) 가운데에서 으뜸의 간, 즉 ‘우두머리 간’이라는 뜻이다. 그에 대해 8세기 신라의 대저술가인 김대문(金大問)은 마립을 말뚝[궐(橛)]의 뜻으로 풀이하고 왕의 말뚝을 위주로 해서 신하의 말뚝을 그 아래에 배열한 데서 나온 용어라고 풀이하였다. 이를 근거로 해서 마립간을 주재자로 삼은 회의체에서의 자리 배치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마립간은 「광개토왕비」, 「충주고구려비」 등 고구려 계통의 당대 금석문과 893년 최치원이 작성한 「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巖寺智證大師塔碑)」에는 매금(寐錦)으로 나온다. 720년 작성된 「일본서기」에도 매금이 보인다.
현재 매금이 곧 마립간이라는 설, 이사금이라는 설, 양자를 결합한 데서 나온 것으로 풀이하는 설 등으로 엇갈려 있다. 1988년 발견된 524년의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에는 매금에 중국식 왕을 덧붙여 매금왕(寐錦王)이라고 칭한 사례가 보인다. 이보다 약간 빠른 503년의 「포항냉수리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에서는 마립간을 그냥 왕이라고 불렀다. 마립간과 왕은 한동안 혼용되었으며 매금에다 때로는 왕을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법흥왕 대 후반에 대왕이란 왕호가 나오기까지 일정한 과도기적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A-00-166]근초고왕(近肖古王)
백제 제13대 왕. 성은 부여씨.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 제12대 계왕이 재위 3년째에 사망함으로써 즉위하였다. 일본의 몇몇 기록에는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등으로 보인다. 「진서(晉書)」 권9 제기(帝紀) 함안(咸安) 2년(372)에 처음으로 동진과 통교하여 ‘진동장군령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로 책봉되었는데 이때의 이름은 여구(餘句)였다. 왕명으로 미루어 제5대 초고왕과의 계보상 친연 관계를 연상시킨다. 주변의 정치 세력을 대상으로 활발한 복속 전쟁을 펼쳐 영토를 크게 넓혔으므로 흔히 백제의 정복군주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사정을 기반으로 황제라 자처하면서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배경 아래 대외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중국의 동진(東晋), 가야, 왜와 우호 관계를 맺어 북방의 강적인 고구려에 맞섰다. 이때 왜에 보내 주어 지금도 실물이 일본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남아 전하는 칠지도(七支刀)는 그런 실상을 뚜렷이 입증해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근초고왕” 참조.
[A-00-167]이품왕(伊品王)
가락국의 제5대 왕. 재위 364~407. 「가락국기」에는 이시품왕(伊尸品王)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제4대 거질미왕(居叱弥王), 어머니는 아간 아궁(阿躬)의 손녀 아지(阿志).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이시품왕” 참조.
[A-00-168]60년간
1년간 차이가 난다. 「가락국기」에서는 62년이라 하였는데, 계산상 61년이 정확하다.
[A-00-169]나밀왕(那密王)
나물왕의 또 다른 표기. 원문에는 보이지 않으나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나물이사금 즉위년조에서 나밀왕이 확인된다. 고려 태조 4년(939)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庵眞空大師普法塔碑)」에는 나물(那勿)이라고 표기한 사례도 보인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나물왕 김제상」조 “나물왕” 참조.
[A-00-170]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
여기서는 나물왕의 아버지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할아버지로 추정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구도갈문왕” 참조.
[A-00-171]미소왕(未召王)
미소왕은 미추왕의 다른 표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제1 「미추왕 죽엽군」조 “미추왕” 참조.
[A-00-172]말구(末仇)
말구는 원문에 빠졌으나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보완하였다. 말구는 구도갈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제13대 미추왕의 아우이다. 관련 기록은 달리 보이지 않는다.
[A-00-173]휴례(休禮)부인
나물왕의 어머니. 성은 김씨. 그 밖의 사항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A-00-174]점성대(占星臺)
첨성대(瞻星臺)의 다른 표현.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는데, 본래의 모습 거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첨성대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오직 본서 권1 기이 제1 「선덕여왕지기삼사」조의 말미에 ‘별기(別記)’를 인용해 “이 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라고만 하였을 따름이다. 그 밖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시대에 정리된 관찬의 역사서나 지리서에 약간의 관련 기록이 보이지만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다. 현재 밑지름이 4.93m, 높이가 9.10m로, 꼭대기에는 돌로 짠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사각 틀이 놓여 있다. 이를 기점으로 아래로 갈수록 조금씩 넓어지고 둥그스름해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의 조형미를 보이는 뛰어난 석조 건축물이다. 전체는 27단이며, 꼭대기까지 포함하면 28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27단의 중앙부에는 3단의 창구 하나가 남쪽을 향해 뚫려 있다. 몸통부의 돌은 전체 362개이며 기단부는 12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점성대나 첨성대란 표현이 시사해주듯이 기능에 대해서는 각인각설의 그럴싸한 주장이 제기되어 아직껏 정설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점성대는 별자리를 매개로 점치는 곳, 첨성대는 별자리를 관찰하는 곳이라는 뜻처럼 천문 관측기구로 보려는 주장이 유력하나 오르내리기에 불편한 점 등을 근거로 해서 그와는 전혀 다른 여러 해석이 제기된 상태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천문 현상에 따른 연월일을 비롯한 4계절, 28수의 별자리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견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견해, 천문관측소가 위치한 곳이라는 견해, 선덕여왕의 탄생을 상징한다는 견해 등 실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선덕왕 지기삼사」조 “첨성대” 참조.
[A-00-175]무덤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
나물왕의 무덤 위치를 알려 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무덤의 구체적 위치가 명시된 자체는 나물왕이 뒷날 김씨 족단의 왕위 계승 체계를 확립한 중시조(中始祖)로서 널리 인식된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이 밖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어느 사서에도 나물왕의 무덤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아 약간의 문제가 뒤따른다. 무덤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고 막연하게 점(첨)성대의 서남쪽이라고 방향만 제시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록 자체도 어디까지나 점성대가 세워진 시점인 선덕여왕을 상한으로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록으로 정착된 시점은 아무리 빨라도 이때를 소급하기 어려우므로 부정확함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나물왕의 무덤을 놓고 논란이 많이 벌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현재 월성(月城) 가까운 곳의 무덤이 나물왕릉으로 비정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나물왕의 무덤이 조성될 당시에는 봉분이 큰 고총과 함께 내부 구조가 독특한 이른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일반적이었다. 무덤이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고총의 적석목곽분은 사로국을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체인 신라 국가가 출범한 정치·사회적 사정에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시 정치는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한 반(半)자립적인 6부(部)를 주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국왕이라도 개별 무덤을 단독으로 조영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공동묘지 가운데 하나로서 들어가는 특징을 띠었다. 현재 대릉원 일대의 집단 고분군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인다.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구별하기 위한 용도로서 따로 능묘비를 세우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덤 안에 넣는 묘지(墓誌)도 작성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나물왕릉을 비롯한 왕릉의 구체적 위치는 잊혀졌다. 현재 나물왕릉을 놓고 위의 기록을 존중하여 표형분인 황남동 119호분으로 보려는 입장과 이미 발굴을 거쳐 내부 구조의 실상까지 드러난 소위 황남대총 남분(98호분)으로 보려는 입장 등으로 크게 엇갈려 논란하고 있다.
[A-00-176]소수림왕(小獸林王)
고구려 제17대 왕.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은 무덤이 조영된 위치에 의해 명명된 시호이다. 원래 이름은 구부(丘夫). 소해주류왕(小解主留王)이라고도 하였다. 해주류왕인 대무신왕과의 어떤 관련성을 암시한다. 고국원왕 25년(355)에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고국원왕이 재위 41년(371)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불의에 사망함으로써 즉위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일시 위기 상황을 맞았으므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태학(太學)을 설치하는 등 일련의 개혁적 시책을 펼쳐 지배 체제 재정비를 추진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여 재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순도조려」조 “소수림왕” 참조.
[A-00-177]구부(丘夫)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의 이름.
[A-00-178]북한산(北漢山)
오늘날 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북한산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산 내의 북한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온조왕 대에 한강 남안(南岸)에 위치한 한산(漢山)에 도읍하였다는 데에 대응하여 북안(北岸)으로 옮겼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6년(371)조의 기사에 따르면,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직접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패사시키는 전과를 올린 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이때의 한산은 바로 한강 이남의 한성, 즉 오늘날 강남의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이 위치한 곳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왕력편의 북한산이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은 듯하다.
[A-00-179]열종(烈宗)
열종은 동진 효무제(孝武帝)의 묘호. 왜 하필 여기서 시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A-00-180]근구수왕(近仇首王)
백제 제14대 왕. 성은 부여씨. 제13대 근초고왕의 아들. 근귀수왕(近貴須王)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귀수, 「위서(魏書)」에서는 수(須)라고 하였다. 왕명으로 보아 제6대 구수왕(귀수왕)과 계보상 친연 관계를 연상시킨다.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즉위하였다. 근초고왕이 만들어 왜에 보낸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 보이는 기생(奇生) 또는 기(奇)를 귀수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태자 시절 아버지를 도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잔여 세력을 복속시키고 낙동강 유역의 가야권으로도 진출하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패사시키는 등 정복 전쟁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위한 뒤에도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한 보복전을 적극적으로 펼친 고구려에 맞서 싸웠다.
[A-00-181]국양왕(國壤王)
고구려 제18대 왕. 성은 고씨. 국양에 묻힌 까닭에 붙여진 시호. 흔히 고국양왕이라 하나 여기서는 고(故)가 빠졌다.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국양왕이라 불렸음을 시사한다. 원래의 이름은 이속(伊速), 이련(伊連), 어지지(於只支)이다. 이속과 이련은 비슷한 글자여서 어느 한쪽이 잘못일 가능성이 있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서 제17대 소수림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소수림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즉위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교서를 내려 불교를 믿도록 유도하고 사직단(社稷壇)을 세우며 종묘를 수리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9년간 재위하여 392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광개토왕비」에는 광개토왕의 즉위가 391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본 왕력편에서 8년간 재위하였다고 한 기록이 올바르다.
[A-00-182]침류왕(枕流王)
백제 제15대 왕. 성씨는 부여. 제14대 근구수왕의 맏아들. 어머니의 이름은 아이(阿爾)부인이다. 백제에서는 왕의 어머니 이름을 밝혀놓은 경우가 매우 드문데 그런 점에서 이는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거기에 어떤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깃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이를 여승을 가리키는 아니(阿尼)와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즉위하자마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이때의 국왕 이름을 수(須)라 하였다. 수(須)는 근구수왕의 이름이므로 기년법에 따라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같은 해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와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이듬해 왕도인 한산에다가 처음으로 절을 창건하고 승려를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난타벽제」조 “침류왕” 참조.
[A-00-183]이속(伊速)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의 이름. 「삼국사기」에는 이련(伊連)으로 나온다. 어지지라고도 한다.
[A-00-184]어지지(於只支)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의 이름. 이속, 또는 이련이라고도 한다.
[A-00-185]광개토왕(廣開土王)
고구려 제19대 왕. 성은 고씨. 이름은 담덕(談德). 중국의 기록인 「양서(梁書)」나 「진서(晉書)」 등에는 안(安)으로 나온다. 제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서 재위 3년(386)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18세 되던 391년 즉위하였다. 즉위하면서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대왕으로 불렸다. 광개토왕은 사후에 붙여진 시호이다. 「광개토왕비」에서는 정식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으며, 역시 같은 해인 415년에 작성된 신라 호우총(壺衧塚) 출토의 토기인 호우 밑바닥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 하였다. 한편 「모두루묘지명」의 ‘△강상성태왕(△罡上聖太王)’이나 「집안고구려비」에 보이는 ‘△평안호태왕(△平安好太王)’이나 ‘호△△왕(好△△王)’ 및 태왕릉(太王陵)에서 출토된 청동 방울에 보이는 ‘호태왕(好太王)’ 등도 모두 광개토왕이라 보고 있다. 아마도 생전에는 주로 호태왕 아니면 연호인 영락태왕(永樂太王) 등으로 불리다가 사후에 그가 일군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광개토나 평안과 같은 수식어를 덧붙여 정식의 시호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호는 장지를 근거로 지은 기존의 관행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이는 광개토왕이 이룬 업적이 그만큼 당대 고구려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어 깊숙이 각인되었음을 뜻한다. 광개토왕은 늘어난 영역에 어울리도록 내부 질서의 재정비를 도모하였다. 수묘제(守墓制)의 전면적인 개편을 시도하고, 평양에 9사(寺)를 건립한 사실 등이 그런 실상을 방증해준다. 수묘제의 근본적인 개편은 비록 진행 도중에 사망해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장수왕에게 넘겨짐으로써 기본 방향이 변화가 있었으나 광개토왕이 생전에 여러 방면의 체제 개편을 도모하였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아마도 이는 비문에 보이는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고 모두가 생업에 힘쓰며 나라와 백성이 부자가 되고 오곡이 풍성해지기”를 희구한 광개토왕의 염원이 어느 정도 구현되었음을 의미한다.
[A-00-186]진사왕(辰斯王)
백제 제16대 왕. 성씨는 부여. 제14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진서(晉書)」에는 이름을 여휘(餘暉)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침류왕의 아들이 어려서 대신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진사가 왕위를 탈취하였다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사망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서는 구원(狗原)의 행궁(行宮)에서 자연사한 것처럼 기록하였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백제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과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A-00-187]담덕(談德)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이름.
[A-00-188]임진년(392)에 즉위하여
왕력편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가 임진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에는 391년 신묘(辛卯)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대체로 후대에 정리한 사서가 유월기년법 혹은 유년기년법을 채택한 데서 빚어진 오차라고 여겨지고 있다.
[A-00-189]아신왕(阿莘王)
백제 제17대 왕. 아방왕(阿芳王)이라고도 하나 「일본서기」에서는 아화(阿花)라고 하였다. 성은 부여씨이며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본 왕력편에서는 진사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고국원왕이 피살당한 복수를 위해 남하해오는 고구려와 관미성(關彌城) 등 북방의 영역을 놓고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그 결과 396년 한성은 함락되고 아신왕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이때 아신왕은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면서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 및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내어놓음으로써 화의하였다. 이듬해인 397년 태자인 전지(腆支)를 화호(和好)를 목적으로 왜에 볼모로 보냈다. 이는 399년 백제가 왜병을 끌어들여 가야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 왕성을 함락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난타벽제」조 “아신왕” 참조.
[A-00-190]아방(阿芳)
백제 제17대 아신왕의 이름.
[A-00-191]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신라 제18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실주(實主) 또는 보금(寶金). 503년의 「포항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탁부 출신의 사부지왕(斯夫智王)을 흔히 실성왕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버지는 대서지(大西知) 각간(또는 이찬)인데, 왕력편에서는 미추왕의 동생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알지의 먼 자손[裔孫]이라고만 하였을 뿐 구체적 세계(世系)를 명시하지 않았다. 혹시 대서지가 미추왕의 동생이라면 구도갈문왕의 아들로서 나물왕에게는 삼촌이 된다. 그렇다면 실성왕과 나물왕은 사촌 사이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실성왕의 왕비인 아류(阿留)를 「삼국사기」에서는 미추왕의 딸이라 하였으므로 대서지가 그의 동생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만약 실성왕이 미추왕의 딸과 혼인하였다면 나물왕과는 동서 사이가 된다. 어머니는 예생(禮生) 혹은 이리(伊利) 혹은 기리(企利)부인인데, 석씨로서 석등보(昔登保) 또는 등야(登也) 아간의 딸이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자 나물왕은 그에 부응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이후 실성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머물다가 401년 귀국하고 이듬해 402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나물왕의 아들들이 어렸던 까닭에 실성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400년에 광개토왕이 5만의 구원병을 파견해 왜와 가야 연합 병력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진 신라를 도운 바 있다. 이후 고구려 병력의 일부가 계속 신라에 주둔하면서 정치적으로 간섭하였다. 그래서 볼모의 경험 때문에 자연스레 친고구려적 입장일 수밖에 없었던 실성이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신라에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려는 고구려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광개토왕비」에는 앞서의 신라왕(매금), 즉 나물왕이 고구려를 직접 예방한 적이 없는데, 현재의 매금 즉 실성왕이 직접 고구려를 다녀온 사실을 밝혀 두고 있음은 그런 실상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실성은 즉위 과정에서 나물왕 이전까지 국왕을 배출한 외가인 석씨 족단으로부터 도움을 크게 받았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지나친 간섭을 벗어나려 하면서 경쟁 세력인 나물왕의 장남인 눌지를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고구려가 도리어 눌지를 지원함으로써 죽임을 당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제18대 실성왕」조 “실성마립간” 참조.
[A-00-192]전지왕(腆支王)
백제 제18대 왕. 진지왕(眞支王) 또는 직지왕(直支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씨이며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왕비는 팔수(八須)부인이다. 팔수부인을 왜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름은 여영(餘映)으로 416년 동진으로부터 정동장군, 420년에는 정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았다. 394년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397년 왜국과의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 볼모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아버지 아신왕의 부음을 듣고 급히 귀국하였으나 계부(季父)인 혈례(碟禮)가 반란을 일으켜 즉위한 상태였다. 전지는 왜병 백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국해 국인들의 도움으로 혈례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전지왕의 사망 시점이 「삼국사기」에는 420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 권10 응신기(應神紀) 25년(수정 연대 414)조에는 이때에 사망하고 아들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면서도 다시 이로부터 14년 뒤인 응신기 39년(수정 연대 428)조에서는 전지왕이 여전히 살아 있는 듯이 묘사하였다. 「송서(宋書)」와 「남사」에서도 동진에 사신을 파견한 당시 영(映)이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지왕의 사망과 관련하여 기년상에 상당한 착란이 보여 실상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A-00-193]영(映)
백제 제18대 전지왕의 이름.
[A-00-194]실주왕(實主王)
신라 제18대 실성왕의 또 다른 표기. 「포항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사부지왕을 일반적으로 실성이라 추정하고 있다. 사부지왕을 소지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A-00-195]보금(寶金)
신라 제18대 실성왕의 이름.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A-00-196]대서지(大西知)
제18대 실성왕의 아버지. 각간 또는 이찬을 역임하였다. 가계에 대해서는 제13대 미추왕의 아우라고 하는 설과 김씨 족단의 시조인 알지의 먼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만약 전자라면 미추왕 및 나물왕의 아버지 말구와 형제로서, 모두 구도갈문왕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후자라면 김씨 족단의 방계로서 가계상 비주류가 된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이후 전개된 나물왕계와 실성왕 사이에 벌어진 다툼의 성격에 대한 이해도 약간 달라질 수밖에 없다.
[A-00-197]예생(禮生)부인
신라 제18대 실성왕의 어머니이며 석등보(昔登保) 아간의 딸로 석씨. 남편은 대서지 각간. 「삼국사기」에서는 이리(伊利)부인, 또는 기리(企利)부인이라고 하였다.
[A-00-198]아간(阿干)
신라 17관등제 가운데 6위인 아찬(阿湌)의 다른 표기.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17관등이 성립하기 전이므로 서열적인 성격과 관직적인 성격을 함께 갖고 있는 직명으로 보인다. 본래 간(干)이 원초적인 표기이며, 7세기 이후 찬(湌)으로 대체되기도 하나 뒷날 간이 다시 사용되었으므로 관등의 표기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아(阿)는 단순한 음차(音差)로 보이나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 6세기에 완성되는 지방민 대상의 11등 외위(外位) 가운데 끝인 제11등이 아척(阿尺)인 점은 그를 풀이하는 하나의 유력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아간” 참조.
[A-00-199]아류(阿留)부인
신라 제18대 실성왕의 왕비. 「삼국유사」에서는 아류의 부모 등 혈연관계와 관련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왕비의 이름은 드러내지 않은 채 단지 미추왕의 딸이라고만 밝히고 있을 따름이다. 만일 그렇다면 실성왕은 나물왕과 동서지간이 된다.
[A-00-200]치술(鵄述)
내용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실성왕의 딸 이름인 셈이다. 다만 이런 식의 서술은 이 밖에 달리 보이지 않으므로 약간 의아스럽게 여겨진다.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나물왕의 아들이자 눌지왕의 막냇동생인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려다가 순절한 박(김)제상의 아내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근거한 추정일 따름이다.
[A-00-201]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신라 제19대 왕. 내지왕(內只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 제17대 나물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미추왕의 딸인 보반(保反) 또는 내례희(內禮希), 내례길포(內禮吉怖)부인. 왕비는 아로(阿老) 또는 차로(次老)부인이며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은 곧 실성왕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두 사람은 혈연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숙적의 관계였다. 그것은 나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점, 눌지가 나물왕의 아들로서 정당한 왕위 승계권자였음에도 실성이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점, 실성왕이 즉위 후 보복적으로 눌지의 두 동생인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을 각각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보낸 점 등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결국 실성왕이 고구려의 힘을 빌려 눌지까지 제거하려다가 고구려가 도리어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도와서 즉위시켰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나물왕 김제상」조 “눌지왕” 참조.
[A-00-202]장수왕(長壽王)
고구려 제20대 왕. 원래 이름은 거련(巨連 또는 巨璉). 줄여서 연(連 또는 璉)이라고도 표기한다. 광개토왕의 맏아들. 광개토왕 재위 18년(408)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413년 즉위하였다. 5세기 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고구려비」에는 조왕(祖王)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는 손자인 제21대 문자왕(文咨王)의 혈연 계보가 반영된 입장에서 나온 표현으로 생각된다. 장수왕이란 시호에서 드러나듯이 재위 기간이 무려 79년이며, 「삼국사기」에는 98세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사서 「위서(魏書)」 등에서는 100세를 넘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장수왕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바로 그해 신묘년에 출생한 셈이 된다. 그래서 451년은 장수왕의 갑년(甲年)이 되는 셈인데 경주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은합우(銀盒杅)에 새겨진 ‘수명을 연장하다’는 뜻의 연수(延壽) 원년명의 연호 내용과도 합치한다. 그러므로 장수왕이 처음 사용한 연호는 알기 어려우나 회갑을 맞은 해에 연수로 바꾼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영역 확장 성공에 어우러지게 내부 체제의 정비에 힘썼으며 그 일환으로서 427년 평양성 천도를 결행하였다. 이는 뒷문의 단속을 강화해 남방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북쪽에서 압박을 가해 오는 북위(北魏)에 적절히 대응하려는 조치였다. 장수왕은 남북의 두 왕조를 대상으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면서 백제를 압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475년 드디어 백제 개로왕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가해 오는 것을 계기로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하였다. 중국 측 기록인 「송서(宋書)」와 「양서」에 장수왕의 이름이 고련(高璉)으로 등장해 고구려가 비로소 이때부터 고씨를 사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적절하지 않은 이해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나물왕 김제상」조 “장수왕” 참조.
[A-00-203]좌지왕(坐知王)
가락국 제6대 왕. 김질왕(金叱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5대 이품왕이며 어머니는 진신(眞信). 왕비는 대아간(大阿干) 도령(道寧)의 딸인 복수(福壽)이다. 처음에는 용녀(傭女)와 혼인하여 그녀의 무리들을 중용하였으나 국내가 요란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가 압박을 가해 오자 마침내 이들을 물리치고 정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좌지왕” 참조.
[A-00-204]거련(巨連)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의 이름. 중국 측 기록에는 대체로 이를 줄인 연(璉)으로 나온다.
[A-00-205]진신(眞信)
가락국 제6대 좌지왕의 어머니로 제5대 이품왕의 왕비. 본서 「가락국기」에 의하면 이품왕의 왕비는 정신(貞信)으로 되어 있어 진신은 정신의 잘못일 가능성이 크다.
[A-00-206]14년간
「가락국기」조에는 15년이라고 하였다.
[A-00-207]내지왕(內只王)
제19대 눌지왕의 다른 표기. 503년의 「포항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내지왕(乃智王)도 같은 표기로 여겨진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나물왕 김제상」조 “눌지왕” 참조.
[A-00-208]내례희(內禮希)부인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딸로 김씨. 보반(保反), 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라고도 한다. 제19대 눌지왕에게는 어머니, 제17대 나물왕의 왕비.
[A-00-209]송(宋)
동진을 뒤이어 420년에 건국된 왕조.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문을 처음 열었다. 동진의 권신인 유유(劉裕)가 황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빌려 즉위하고 국호를 송으로 바꾸었다. 같은 이름의 다른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흔히 유송(劉宋)이라고 한다. 8대에 걸쳐 60년간 존속하다가 송의 무장으로 남제(南齊)를 세운 소도성(蕭道成)에게 탈취당하였다.
[A-00-210]구이신왕(久爾辛王)
백제 제19대 왕. 성은 부여씨. 제18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본서 왕력편이나 「삼국사기」에는 7년간 재위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과 관련해 여러모로 특이한 기사가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먼저 즉위 시점에 대해서이다. 응신기 25년(수정 연대 414) 전지왕이 사망하자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왕력편이나 「삼국사기」와는 6년의 차이가 난다. 「송서(宋書)」와 「남사(南史)」에는 424년 영(映), 즉 전지왕이 유송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하여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기록되어 상당한 착란도 보인다. 둘째, 즉위할 때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왕모(王母)와 사통(私通)하는 관계였다는 목만치(木滿致)가 집정해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만치는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에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당했을 때 문주왕을 도와 옹진으로 남천(南遷)하는 데에서 이름이 보인다. 목만치의 활동이 보여주는 사서의 기록은 대체로 60여 년의 시차가 난다. 그래서 이를 둘러싸고 크게 논란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일본서기」에 의하면 전지왕이 응신기 39년에도 여전히 생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점이다. 이런 사정을 보면 전지왕 및 구이신왕과 관련한 기록에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이 드러난다. 당시 백제의 국내 정치의 복잡한 사정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A-00-211]취희왕(吹希王)
가락국 제7대 왕. 이름은 김희(金喜) 또는 질가(叱嘉). 아버지는 제6대 좌지왕이며 어머니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福). 「가락국기」에서는 복수(福壽)라고 하였다. 복은 복수의 단순한 축약일 수도 있고 서사나 판각에 잘못을 범하였을 여지도 있다. 왕비는 각간 진은(進恩)의 딸 인덕(仁德)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취희왕” 참조.
[A-00-212]김희(金喜)
‘金’을 흔히 김으로 읽지만 김이 성이 아니라면 금희라고 읽을 여지도 보인다. 하지만 이는 후대에 사용된 김씨 성을 상기시켜 이해한 것이다. 만약 김이 성이라면 희만이 이름일 수 있다.
[A-00-213]복(福)
제6대 좌지왕의 왕비이자 제7대 취희왕의 어머니. 대아간 도령의 딸이다. 「가락국기」에는 복수(福壽)로 되어 있다. 복은 복수의 단순한 축약일 수도 있고 서사나 판각에서 빚어진 실수일 수도 있다.
[A-00-214]평양성(平壤城)
오늘날의 평양으로 대동강의 북안에 위치하였다. 낙랑군의 중심지는 대동강의 남안에 있고 그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는 북안에 있었다. 이는 여러모로 당대의 대외 전략상의 차이에서 비롯한 조치인 듯하다. 고구려는 313년 낙랑군을 제압해서 이 지역을 영역으로 편입시켰으나 오래도록 기존의 자치적 기반을 유지시켜 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자치적 기반을 지킨 상태에서 광개토왕 2년에는 9개의 절을 평양성에 지었다고 한다. 이는 당해 지역을 전략적으로 매우 중시하여 지배력을 강화시켜나가는 조치이면서 뒷날 천도를 예비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러다가 장수왕은 427년에 이르러 당면한 안팎의 필요성 때문에 강한 반대 입장을 억누르면서 천도를 단행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보장봉노 보덕이암」조 “평양성” 참조.
[A-00-215]세조(世祖)
유송(劉宋) 제4대 효무제의 묘호. 다른 곳과는 다르게 왜 시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A-00-216]비유왕(毘有王)
백제 제20대 왕. 「삼국사기」에서는 제19대 구이신왕의 맏아들 혹은 제18대 전지왕의 서자(庶子)라는 두 설을 함께 소개하면서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른다는 단서를 달았다. 구이신왕이 427년에 사망할 때의 나이가 23세였음을 고려해 전자보다는 후자로 보는 견해가 한층 유력하다. 남조의 송이 선왕(先王)인 전지왕의 작위를 그대로 인정하였다는 사실도 그런 추정을 보강해 준다. 성은 부여씨. 이름은 비(毗). 비라는 이름으로 중국 남조와 통교하였다. 비유왕이라는 왕명 자체는 제11대 비류왕과의 상호 친연 관계를 연상시킨다. 재위 29년(455)에 왕도인 한성에서 기상이변이 일어나 흑룡(黑龍)이 날아간 뒤 비유왕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를 정변이 일어난 근거로 삼으려는 논자도 있다.
[A-00-217]질지왕(銍知王)
가락국 제8대 왕. 아버지는 제7대 취희왕이며, 어머니는 각간 진은(進恩)의 딸인 인덕이다.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방원(邦媛)인데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이다.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처음 수로왕과 혼인한 곳에다 452년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불렀다. 불교가 바로 이 무렵에 가락국에 수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좌지왕” 참조.
[A-00-218]인덕(仁德)
가락국 제7대 취희왕의 왕비로 제8대 질지왕의 어머니. 각간 진은(進恩)의 딸이다.
[A-00-219]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신라 제20대 왕. 성은 김씨. 제19대 눌지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아로(阿老) 또는 차로(次老)부인으로 제18대 실성왕의 딸이다. 왕비에 대해서는 뚜렷하지 않아 파호(巴胡)갈문왕의 딸, 미질희(未叱希) 각간의 딸, 미사흔(未斯欣) 각간의 딸이라는 등의 여러 이설이 있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4년(461)조에는 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되어 있다. 왕비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몇몇 이설이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뜻한다. 즉 본서 왕력편에서 자비왕의 아들인 소지왕의 어머니를 미흔 각간의 딸이라 한 점이나, 「삼국사기」에서 소지왕을 자비왕의 장남이라고 한 반면, 여기에서는 셋째 아들이라고 하는 등 혼란을 보인 점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뒷날 소지왕과 지증왕이 다툼을 벌이게 된 것도 이런 실상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A-00-220]개로왕(蓋鹵王)
백제 제21대 왕. 제20대 비유왕의 맏아들.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하는데 제4대 개루왕과는 어떤 친연 관계를 연상시킨다. 「일본서기」 권14 웅략기(雄略紀) 5년조에서는 개로왕을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 하였다. 성은 부여씨. 이름은 경사(慶司), 중국 사서에는 여경(餘慶)으로 나온다. 즉위 이후 왕권에 위협적일 정도로 강한 정치적 기반을 가진 전통 귀족인 진(眞)씨와 해(解)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왕족 부여씨와 여타 기반이 미약한 정치 세력을 중용하였다. 이를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을 샀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왕권 중심 지배 체제의 기반을 공고히 한 뒤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하여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왕제(王弟) 곤지(昆支)를 왜에 보내어 세력 기반의 약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는 한편 고구려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를 위해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고구려 장수왕이 비밀리에 보낸 승려 도림(道琳)의 책략에 속아 토목 공사를 과도하게 일으켜 국력을 소모함으로써 도리어 대대적인 역공을 받았다. 그 결과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도망하다가 사로잡혀 죽임을 당함으로써 백제는 멸망 지경에 다다랐다. 뒤를 이어 한성에서 즉위한 동생 문주왕이 황급히 웅진으로 천도해 백제 국가를 재건하였다.
[A-00-221]근개로왕(近蓋鹵王)
백제 제21대 개로왕의 일명이지만 제13대 근초고왕이나 제14대 근구수왕의 사례로 미루어 제4대 개루왕과의 어떤 혈연적 친연 관계를 의식해서 그처럼 불렸을 듯하다.
[A-00-222]아로(阿老)부인
차로부인이라고도 한다. 신라 제20대 자비왕의 어머니. 제18대 실성왕의 딸로서 제19대 눌지왕의 왕비이기도 하다.
[A-00-223]파호(巴胡)갈문왕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비왕의 왕비 아버지. 파호와 관련하여 달리 기록이 보이지 않아 실체를 놓고 논란이 있다. ‘파호’의 ‘파’가 ‘복’으로도 불린 사실을 근거로 해서 눌지왕의 바로 아래 아우인 복호(卜好)와 같다고 보는 견해, 눌지왕의 막내아우로서 왕비의 아버지인 미사흔으로 보는 견해 등 크게 두 입장이 엇갈려 있다. 이름이 비슷한 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자비왕이 처음에는 복호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나 어떤 사정으로 말미암아 미사흔의 딸과 재혼하였을 여지도 엿보인다.
[A-00-224]미질희(未叱希)
신라 제17대 나물왕의 아들이자 제19대 눌지왕의 동생인 미사흔이라고 보는 견해와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4년(461)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전자가 타당한 것 같다.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파사이질금(婆娑尼叱今)” 참조.
[A-00-225]오(吳)나라
220년 후한의 멸망으로 출현한 위(魏) 및 촉(蜀)과 함께 삼국을 정립한 나라 이름. 오는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손권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280년까지 존속하다가 위를 이은 사마(司馬)씨의 진(晉)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렇다면 자비왕 대인 5세기 후반에 오나라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라는 용어는 흔히 강남 지역을 막연히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남조(南朝)의 왕조 가운데 시기적으로 보아 특히 송(宋)을 지칭할 가능성이 크다. 신라가 남조의 송과 통교한 사례가 달리 없으므로 그 자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판별하기 곤란하다. 다만 신라가 남조와 처음 통교한 대상이 521년 양(梁)나라인데 그나마 백제 사신의 안내를 받아서였다. 신라가 오와 처음으로 통교한 내용과 이하 기미년 왜병이 침공한 사실을 함께 따로 설정한 것은 본 왕력편의 찬자가 이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시사한다.
[A-00-226]기미년(479)
기미년은 자비왕의 재위 기간으로 미루어 479년인 듯하다. 바로 이 해에 왜가 공격해 온 까닭에 처음 명활성을 축조해서 대비한 듯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는 같은 해에 왜가 신라를 공격한 기록이 보이지 않거니와 자비왕이 명활산성으로 피난한 시점도 475년이므로 그와 다르다. 따라서 이 기록에는 잘못된 사항이 들어있다고 함이 적절하겠다.
[A-00-227]왜국
왜족이 세운 나라라는 뜻. 하지만 왜국이 때로는 구체적인 국명으로, 때로는 막연하게 일본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왜국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왜국” 참조. 일본에 관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성왕」조 “일본” 참조.
[A-00-228]명활성(明活城)
경북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친 명활산을 에워싸고 있는 석축의 산성. 현재 사적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둘레는 약 6km 남짓이며 성벽이 무너져 돌무더기 상태로 남은 곳도 적지 않지만 거의 원상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한 곳도 있다. 성내에는 건물지 6곳, 수구문 터 4곳, 성문 터 7곳 등이 확인되었다. 근자에 북문 터로 추정된 일대가 발굴을 거쳐 복원된 상태이다. 원래 석축 산성에 앞서 토성이 먼저 조성되어 있었다. 산성이 언제 처음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록상으로는 405년(실성왕 4) 왜병 공격 기사가 처음 보이므로 그 이전으로 봄이 적절할 듯하다. 다만 이때의 성이 석성인지 토성인지는 판단하기 곤란하다. 이후에도 왜병이 명활산성을 공격한 사례가 여럿 보이는데 주로 왜에 대비하기 위한 용도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473년(자비왕 16)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한 기록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바로 같은 해에 아찬 벌지(伐智)와 급찬 덕지(德智)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아마도 군사 조직의 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일환으로서 명활산성을 수리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무렵 삼년산성(三年山城)을 비롯한 전국의 군사적 요충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전운이 크게 감돌던 당시 분위기 전반을 반영한다. 464년 신라가 왕경에 주둔하던 고구려 병력 100여 명을 몰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거니와 이후 고구려가 적극 공세를 가하던 정황과 맞물린 조치였다.
475년 1월에는 자비왕이 왕궁을 명활성으로 옮겼다. 바로 이해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그 왕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목 베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보면 신라가 명활성을 수리하고 왕궁으로 삼았음은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세 대비용이었음이 확실하다. 자비왕은 이 산성에서 머물다가 4년 만인 479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소지왕이 여기에서 즉위하였다. 소지왕 재위 10년(488)에 이르러서야 월성(月城)으로 옮겼으므로 명활산성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왕궁으로 기능한 셈이다.
신라가 백제, 가야와 함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던 551년에도 전국적 차원에서 역역을 동원하여 명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3년 만인 554년에 완공을 보았다. 이와 관련한 대강의 사정은 1988년 발견된 551년의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와 안압지(월지) 호안 석축에서 출토된 바 있는 비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명활산성은 647년 1월 즉위를 겨냥해 난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毗曇)이 근거지로 활용하였다. 이 난이 실패로 끝나면서 의도적인 폐기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문지와 함께 주변의 일부 성벽이 발굴을 거쳐 복원된 상태이다.
[A-00-229]양주(梁州)
양주는 고려 시대에 지금의 양산(梁山)을 가리키던 지명. 신라 시대에는 삽량(歃良)이라고 불렀다. 문무왕 5년(665) 왕경을 기준으로 영남 전역(신라와 가야의 옛 영역)을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눈 광역의 행정 구획인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각 일부를 분할해 삽량에 따로 주치를 두고서 삽량주라고 하였다. 687년(신문왕 7)에는 주치에 축성한 기록이 보인다. 경덕왕 대에는 삽량주를 양주(良州)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에 다시 양주(梁州)로 바꾸었다. 따라서 왕력편의 이 지명은 매우 부정확한 표현인 셈이다.
[A-00-230]문주왕(文周王)
백제 제22대 왕. 문주(文州), 문주(文洲), 문주(汶洲)라고도 표기한다. 왕력편이나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에는 제21대 개로왕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전후 맥락과 함께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475)조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개로왕의 아우라고 봄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제20대 비유왕이 되는 셈이다. 백제가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문주는 개로왕의 특명으로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문주가 신라로부터 구원병 1만을 빌려서 귀국하였을 때 이미 한성은 함락되었고 개로왕은 전사한 뒤였다. 문주는 한성에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문주왕” 참조.
[A-00-231]개로의 아들이다.
본 왕력편에서는 물론 「삼국사기」에서도 문주를 개로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문주는 개로왕의 큰 아우이다.
[A-00-232]웅천(熊川)
금강 유역에 있던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오늘날의 충청남도 공주. 475년 한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당해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급작스럽게 이곳으로 천도한 뒤 63년간 수도로 활용되었다.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웅천” 참조.
[A-00-233]삼근왕(三斤王)
백제 제23대 왕. 문근왕(文斤王), 삼걸왕(三乞王), 임걸왕(壬乞王)이라고도 한다. 임걸왕의 임(壬)은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빚어진 삼(三)의 잘못일 여지도 있다. 제22대 문주왕의 장남이다. 문주왕 재위 3년(477)에 태자로 책립되었다. 바로 그 해에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시해하고 13세의 어린 태자 삼근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군국정사 일체를 좌평인 해구가 맡음으로써 정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재위 2년(478) 봄에 해구가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大豆城)을 근거지로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가 덕솔 진로(眞老)에 의해 진압당하자 정치적 실권은 일시에 진(眞)씨 쪽으로 넘어갔다. 재위 3년 만에 1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A-00-234]삼걸왕(三乞王)
제23대 삼근왕의 다른 왕명.
[A-00-235]제(齊)
479년 난릉(蘭陵) 출신의 소도성(蕭道成)에 의해 건국된 남조의 두 번째 왕조. 같은 국명의 다른 왕조와 구별하기 위하여 남제(南齊) 또는 소제(蕭齊)라고도 한다. 소도성은 하급 군인 출신으로서 유후범이 일으킨 반란의 진압에 성공하면서 권력자로 부상하고 마침내 479년 송의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즉위해 ‘제’를 건국하였다. 이후 502년에 이르기까지 겨우 7대에 걸쳐 20여 년밖에 존속하지 못한 단명의 왕조였다.
[A-00-236]태조(太祖)
남제의 창건자 고제(高帝)의 묘호. 왜 시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A-00-237]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
신라 제21대 왕. 소지왕의 여러 다른 표기 가운데 하나. 왕력편에서는 제20대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에서는 장남이라 하여 차이가 난다. 어머니는 눌지왕의 막냇동생인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를 왕력편에서는 기보(期寶)갈문왕의 딸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내숙(乃宿) 이벌찬의 딸인 선혜(善兮)부인이라 하여 차이를 보인다. 기보와 내숙을 동일인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름이 전혀 달라 다른 사람으로 봄이 적절할 것 같다. 양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내숙은 진흥왕 대의 명신 거칠부(居柒夫)의 할아버지이므로 선혜는 거칠부에게 고모가 되는 셈이다. 소지왕은 재위 22년째인 50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아들이 없어 지증왕이 즉위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503년의 「포항냉수리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의 발견으로 전혀 다른 내용이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소지왕의 죽음 자체에 대한 의문이 일어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사금갑」조 “비처왕” 참조.
[A-00-238]소지왕(炤知王)
신라 제21대 왕인 비처왕의 훈차(訓借) 표기. 조지왕(照知王)으로도 표기한다. 503년의 「포항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사부지왕(斯夫智王)’을 실성왕이 아닌 소지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사금갑」조 “소지왕” 참조.
[A-00-239]자비왕의 셋째 아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에서는 소지왕을 자비왕의 장남이라 하여 차이를 보인다. 찬자의 단순한 실수로 돌릴 여지도 엿보이지만, 자비왕의 왕비가 여럿 등장하며, 또 즉위한 뒤 결혼한 사실로 미루어 가족 관계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던 데서 비롯한 것 같다. 자비왕의 주변과 관련해 어떤 복잡한 내막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A-00-240]미흔(未欣)
미사흔의 여러 표기 가운데 하나. 미사흔은 사서에 따라 미질희(未叱希), 미토희(未吐希), 미해(美海), 미질기지(微叱己智), 미질허지(微叱許智)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불리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나물왕의 세 아들 가운데 눌지, 복호에 이은 셋째이다. 다만 본 왕력편에 보이듯이 만약 지증왕의 아버지인 기보(期寶)갈문왕이 눌지왕의 동생이라면 나물왕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던 셈이 된다. 실성왕이 즉위하던 바로 그해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었다. 실성왕은 10년 뒤에는 다시 그의 형인 복호까지 고구려에 보내고 마침내 눌지까지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보아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실성왕은 자신의 정치적 걸림돌이라 할 나물왕계의 제거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것 같다. 눌지왕은 즉위하자마자 바닷길을 비롯해 외부 세계의 움직임에 비교적 밝은 박제상을 발탁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구출하였다. 그러다가 박제상은 왜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김씨 족단의 주류들 일각에서는 근친혼(近親婚)이 일반화된 듯하다. 자비왕이 복호의 딸이나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는 것도 바로 그런 실상을 반영한다.
[A-00-241]기보(期寶)갈문왕
신라 제21대 소지왕의 왕비 아버지. 한편 같은 왕력편에서는 제22대 지증왕의 아버지가 기보갈문왕인데, 이를 눌지왕의 아우라고도 하였다. 만약 왕력편 내용이 사실이라면 소지왕과 지증왕은 처남 매부지간이면서 동시에 부계로서는 소지왕이 지증왕의 오촌 조카가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에 의하면 지증왕의 아버지는 기보가 아니라 습보(習寶)갈문왕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지증왕은 나물왕의 증손이라고 하여 왕력편과는 차이를 보인다. 기보와 습보가 동일인이라고 하더라도 나물왕을 기준으로 하면 이들의 계보상에는 석연치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이 드러난다.
[A-00-242]동성왕(東城王)
백제 제24대 왕. 말다왕(末多王)이라고도 불렀다. 이름은 모대(牟大), 여대(餘大) 또는 마모(摩牟). 그 밖에 중국 사서에는 모도(牟都), 태(泰) 등으로도 나온다.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다섯째 아들 중 둘째이다. 곤지는 461년 왜로 갔다가 16년 만에 귀국하였는데, 그동안 그곳에서 아들 여러 명을 낳았던 것 같다. 동성은 곤지가 귀국한 뒤에도 계속 왜에 머물다가 479년 삼근왕이 사망하자 왜의 병력 5백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국해 즉위하였다. 즉위 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새롭게 확충하기 위해 백(苩)씨, 연(燕)씨와 같은 금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은 신진의 세력을 적극 등용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또 다른 내분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재위 23년에 가림성(加林城)을 근거지로 반란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였다. 「일본서기」 권16 무열기 4년조에는 동성왕이 무도(無道)해서 국인이 제거하고 무령왕(武寧王)을 세웠다고 한다.
[A-00-243]모대(牟大)
동성왕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 「삼국사기」에도 보인다. 다만 중국 측 사서에서는 모태(牟太) 또는 태(泰)라 하였다.
[A-00-244]마제(麻帝)
동성왕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 여기에만 보인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모(摩牟)라는 다른 이름이 보인다.
[A-00-245]여대(餘大)
동성왕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 「삼국사기」와 중국 측 사서에서도 보인다.
[A-00-246]삼근왕의 사촌 동생[당제(堂弟)]
동성왕이 삼근왕의 사촌 동생임을 나타내는 표현. 다만 연령상으로 보아 동성왕이 사촌 형일 여지도 보인다.
[A-00-247]폐제(廢帝)
493년에 울림왕(鬱林王)이, 494년에 해릉왕(海陵王)이 즉위하였으나 양자 모두 잇달아 폐위되었는데, 이때의 폐제란 이들 양자를 함께 가리킨다.
[A-00-248]문자명왕(文咨明王)
고구려 제21대 왕. 문자왕 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나운(羅雲) 또는 고운(高雲)이다. 제20대 장수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그 왕자로서 고추대가(古鄒大加)인 조다(助多)이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에서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궁중에서 길러져 태손(太孫)으로서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장수왕이 오랜 기간 재위한 까닭에 태자 조다가 일찍이 사망하였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약간 의아스럽다. 5세기 말엽 세워진 「충주고구려비」에는 할아버지 왕이란 뜻의 조왕(祖王)과 함께 태자가 등장한다. 이 태자가 바로 즉위 이전의 문자왕이거나 아니면 그의 아버지 조다일 가능성도 있다. 북위는 고구려를 강하게 압박하여 왕녀나 왕자를 보내도록 요구하였지만, 장수왕은 적절히 거절하면서 대응하였다. 그런 양상은 문자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문자왕이 즉위하자 친조(親朝)나 친자입조(親子入朝)를 요구하였는데, 아프다는 핑계로 종숙(從叔)을 대신 파견하자 강하게 협박하는 조서를 보냈다. 그 조서가 당나라 초기에 편집된 「문관사림」 속에 남아 전해져 당시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도움을 준다.
[A-00-249]겸지왕(鉗知王)
가락국 제9대 왕.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8대 질지왕이며, 어머니는 사간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비는 각간 출충(出忠)의 딸 숙녀(淑女)이다.
[A-00-250]방원(邦媛)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의 왕비. 아버지는 사간 김상. 제9대 겸지왕의 어머니.
[A-00-251]29년간
「가락국기」에는 30년이라고 하여 1년 차이를 보인다.
[A-00-252]고종(高宗)
남제 제5대 황제 명제(明帝)의 묘호. 왜 시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A-00-253]명리호(明理好)
고구려 제21대 문자왕의 이름. 문자왕을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 부른 것과도 관련되는 듯하다. 고운 또는 나운이라고도 하였다.
[A-00-254]나운(羅雲)
본 왕력편에서는 개운(个雲)으로도 읽힐 여지도 보이나, 「삼국사기」에 따라 나운이 옳다고 봄이 일반적이다.
[A-00-255]고운(高雲)
고구려 제20대 문자왕의 이름. 중국의 사서 가운데 주로 「양서」와 같은 남조 계통의 사서에서는 고운, 「위서」와 같은 북조 계통의 사서에서는 운(雲)으로 나온다. 이때 고(高)는 성일 듯싶다. 492년 무렵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후위(後魏), 즉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고구려왕에게 보낸 조서에도 문자왕의 왕명이 운(雲)으로 되어 있다.
[A-00-256]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
신라 제22대 지증왕. 지정왕이라는 표기는 달리 사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 지증은 일명 지철로(智哲老) 또는 지도로(智度路), 지대로(智大路)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제19대 눌지왕의 딸인 조생(또는 오생)부인이고 왕비는 박씨 등흔 이찬의 딸인 연제부인이다. 아버지는 왕력편에서는 눌지왕의 동생인 기보갈문왕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습보(習寶)갈문왕이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양자가 같은 인물일 수도 있고 다른 인물일 여지도 있다. 그런데 기보는 전자에 따르면 눌지왕의 아우라 하였으므로 나물왕의 아들인 반면 후자에 따르면 지증왕이 나물왕의 증손이라 하였으므로 습보는 그 손자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계보상으로 양자가 같을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소지왕과 지증왕의 혈연관계의 혼동을 초래한 근본 요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을 눌지왕의 육촌 동생[재종제(再從弟)]이라고 밝힌 반면, 본 왕력편에 의하면 소지왕은 오히려 항렬이 하나 낮아 지증왕의 오촌 조카[당질(堂姪)]로 된다.
이처럼 기보를 중심으로 가계상의 문제점이 드러난 상황에서 1989년 「포항냉수리신라비」가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 비는 503년 세워진 것으로서, 지증왕이 즉위 직전 갈문왕을 역임해 기존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 문헌처럼 500년에는 지증왕이 아직 즉위한 상태가 아니라 503년까지 국왕(매금왕)이 아닌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국왕은 6부 가운데 탁부 출신인 반면, 지증왕의 경우 소속 부가 사탁부라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 말미암아 소지왕과 지증왕의 왕위 교체 자체가 순조로운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며 비정상적인 방법을 거쳤다는 추론이 가능해짐으로써 여러모로 논란거리가 되었다. 특히 지증왕이 전무후무하게 64세의 고령으로 즉위한 점이나 503년 신라 국호가 확정된 사실 및 마립간(매금) 대신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사실 등등은 전면 재조명해 볼 대상으로 떠올랐다. 소지왕이 말년에 날이군(捺已郡), 즉 오늘날 경북 영주시 지역으로 행차하여 그곳 재지 유력자인 파로(波路)의 딸로서 16세인 벽화(碧花)를 궁중으로 데려와 아이를 낳은 사실도 주목의 대상이 된다. 지증왕을 비롯한 당시 비주류 경쟁 세력이 소지왕 중심의 주류들과 다툼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왕위에 오른 것이라는 추론도 나왔다. 그렇다면 이는 단순한 왕위 계승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패러다임의 변동으로서, 부 체제의 해체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집권적 지배 체제로 전환하는 계기라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지철로왕」조 “지철로왕” 참조.
[A-00-257]지도로왕(智度路王):
지철로, 지대로 등과 함께 지증왕의 여러 표기 가운데 하나. 503년의 「포항냉수리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에는 갈문왕으로서 지도로(至都盧)로 표기되었다. 5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항중성리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의 첫머리에 보이는 △△盧도 역시 지도로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지도로에 대해서는 본조의 주256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지철로왕」조 “지철로왕” 참조.
[A-00-258]오생(烏生)부인
신라 제22대 지증왕의 어머니. 제19대 눌지왕의 딸로서 기보갈문왕의 부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이 습보갈문왕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조생(鳥生)부인이라고 하였다 오(烏)와 조(鳥)의 글자가 비슷하여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으로 보이나 어느 쪽이 올바른지는 선뜻 가늠하기 곤란하다. 기보와 습보도 마찬가지이다.
[A-00-259]영제(迎帝)부인
제22대 지증왕의 왕비. 바로 아랫부분의 ‘검람대한지등허’로 보면 한지부 출신인 등허 각간의 딸처럼 보인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에서는 지증왕의 왕비가 박씨 연제(延帝)부인이며 등흔(登欣) 이찬의 딸이라 하였다. 영(迎)과 연(延)은 발음뿐만 아니라 글자도 비슷하므로 혼용하였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일 수가 있다. 본서 권1 기이편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는 지증왕이 즉위한 뒤 모량부(牟梁部) 상공(相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즉위 당시 지증왕의 나이가 64세였으므로 이것이 초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원래 왕비가 있었으나 이 무렵 때에 재혼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연제(또는 영제)부인을 모량부 상공의 딸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단정하기 어렵다.
[A-00-260]검람대한지등허(儉攬代漢只登許)
전체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지증왕 비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대목임은 확실하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분석적 이해가 요구된다. 일단 ‘검람대’와 그 이하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검람대’는 뒷부분에 대한 수식어이거나 그에 대한 어떤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일 듯하나 전후 맥락이 잘 닿지 않아 의미가 뚜렷하지 않다. 뒷부분은 ‘한지 출신의 등흔(혹은 ▽▽)각간’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연제(영제)부인은 한지부 출신으로서 등흔 각간의 딸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가 있다.
[A-00-261]▽▽
본문에 ▽를 하나로 추정하였으나 바로 앞의 ‘일작(一作)’을 고려하면 두 글자일 여지가 커서 이처럼 보완하였다.
[A-00-262]경진년(500)에 즉위하여
이 기록뿐만 아니라 본서 권1 기이편 「지철로왕」조나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에서도 지증왕이 모두 경진년(500)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동안 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503년 9월에 작성된 「포항냉수리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에는 지도로(至都盧)가 국왕이 아닌 갈문왕으로 등장해 이때까지 아직 즉위하지 못한 상태라는 전혀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지증왕의 즉위 배경과 과정에 대한 다양한 논란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503년 10월에 국호를 신라로 확정한 사실이나 이와 함께 마립간 대신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사실 등은 바로 지증왕의 국왕(매금왕) 즉위 사실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A-00-263]무령왕(武寧王)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은 시호. 성은 부여씨로서 원래 이름은 사마(斯摩) 또는 융(隆). 생전에 도왕(嶋王), 사마왕(斯麻王)이라고도 하였다. 왕력편에서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 반면,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에서는 셋째 아들이라 하였다. 하지만 「일본서기」 권16 무열기(武烈紀) 4년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琨支王)의 아들이며, 동성왕에게는 이모형(異母兄)이라 하였다. 사실상 탄생 설화를 비롯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무령왕의 실제 아버지는 제21대 개로왕이며, 곤지는 차라리 의붓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동성왕에게는 친동생이 아닌 사촌형이 되는 셈이다. 무령왕을 둘러싼 혈연관계가 대단히 복잡해 갈피를 잡기 힘든 것은 한강 유역의 상실, 웅진 천도와 내부의 정치적 혼란 및 곤지의 도왜(渡倭) 등등의 여러 사정이 복잡하게 뒤얽힌 결과였다.
무령왕은 40세에 즉위하였는데 내부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토대로 한강 유역 등의 고지 회복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 개로왕의 명예를 회복하고 백제의 재흥을 줄곧 희구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꿈은 아들인 성왕 대까지 이어졌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묘지(墓誌)와 함께 매지권(買地券)이 출토되었는데, 무령왕이 생전 사마왕과 함께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으로 불리고 「양서」 권54 열전 백제조에 521년 남조 양으로부터 작호를 받은 사실이 그대로 입증되었다. 몇 차례 모사의 과정을 거친 것이기는 하나, 당시의 장면이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이름으로 제기(題記)와 함께 그림으로 남아 전한다. 바로 이때 무령왕은 양나라에 백제가 다시 강국으로 부상하였음을 알렸다. 묘지에서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이라고 표현한 것 등도 그런 인식의 반영인 것으로 풀이된다. 묘지에 의하면 523년 사망할 때의 나이가 62세였으므로 그의 출생이 461년임이 드러났다. 이는 「일본서기」 권14 웅략기(雄略紀) 5년조에 보이는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를 통해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나 사마왕이라 불리게 된 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A-00-264]사마(斯摩)
무령왕의 이름. 무령왕릉 출토의 묘지에서 그대로 왕명으로 사용되었다. 곤지가 잉태한 상태의 개로왕 여인과 함께 왜로 건너가던 도중 축자(筑紫)의 각라도(各羅嶋)에서 아들을 낳게 되자 도군(嶋君)이라 부른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A-00-265]동성의 둘째 아들이다.
무령왕을 여기서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 반면, 「삼국사기」에서는 셋째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 권16 무열기 4년조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는 설,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설 등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여러 정황과 함께 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에게는 사촌 형에 해당한다고 봄이 유력하다.
[A-00-266]「남사(南史)」
당나라 고종 때에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기전체의 역사서. 25사 가운데 하나. 남조의 왕조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전체 80권으로 구성되었다. 이연수는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받아 북조 왕조의 역사를 다룬 「북사」도 편찬하였다. 이들에는 삼국과 관련한 내용을 열전에 싣고 있다.
[A-00-267]여융(餘隆)
무령왕의 이름. 「양서」 권54 백제전에는 521년 무령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을 때의 이름이다. 「남사」는 물론 「북사」에서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A-00-268]이름을 여융(餘隆)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무령왕을 「남사」에서 여융이라 한 것에 대해 왕력의 찬자는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의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무령왕도 여융이었으므로, 이는 찬자의 단순한 착각이다.
[A-00-269]의자왕(義慈王)
백제 제31대 왕. 무왕의 아들. 재위시의 이름이 의자(義慈). 이때에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는 따로 없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웅진성에서 항복한 뒤 당으로 끌려가 얼마 뒤 거기에서 죽은 뒤 낙양(洛陽)의 북망산에 묻혔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의자왕” 참조.
[A-00-270]「당사(唐史)」
단순히 당의 역사서라는 뜻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신당서」를 가리키는 듯하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 법민」조 “당서” 참조.
[A-00-271]상고(上古)
「삼국유사」에서 사용된 신라사 시기 구분의 방식인 삼고법(三古法) 가운데 첫 단계에 해당하는 시기. 제1대 박혁거세부터 제22대 지증왕 대까지를 가리킨다. 흔히 상고라면 중국 고대의 이상 사회로서 왕위의 선양(禪讓)이 행해지던 시기를 일컫는다. 이는 자신이 살던 시기를 기준으로 이전 시대 전체를 3시기로 구분할 필요성에서 나온 용어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도 역시 3시기 구분법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런 양상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인간이 경험한 시간 전체를 3개 단위로 나누어서 이해하려 한 것이 널리 퍼진 생각이었던 듯하다. 이는 각 단계가 질적 측면에서 다르다고 인식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도 질과 양의 두 측면에서 엄청난 변동을 겪었으므로, 전체 기간을 같은 선상에 두고서 파악해서는 실상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다. 그래서 도입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삼국유사」에서 취하고 있는 삼고법이다. 어떤 시각과 입장에서 신라 천년사의 흐름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구체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의 세 시기로 구분한 삼대법(三代法)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유학자들의 인식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A-00-272]중고(中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삼국유사」가 설정한 삼고법으로 구분했을 때 상고와 하고 사이에 낀 일정 기간을 가리키는 용어. 제23대 법흥왕(法興王, 514~540)부터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4)까지 대략 여섯 왕의 140년간을 일컫는다. 중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왕명이 불교식인 사실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망한 뒤에 업적이나 특성에 따라 주어진 시호가 아니며 생존 당시 사용하던 왕명이다. 그것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겠다는 강한 의식의 발로였다. 그래서 이 시기를 불교시 왕명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국왕을 비롯한 왕족을 선후하면서 전륜성왕 의식이나 석가족 신앙으로 포장한 것은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신라가 6부 중심의 공동체성이 강한 이른바 부체제적 질서로부터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전환하면서 내부 질서를 새롭게 갖추어나간 시기이다. 따라서 신라적인 모습을 구비하면서 선진의 고구려나 백제를 따라잡아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나간 데에 주요한 특징을 보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A-00-273]양(梁)
502년 옹주자사였던 소연(蕭淵)에 의해 건국된 남조의 왕조. 소연은 제나라 마지막 황제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즉위해 무제가 되었다. 48년 동안 재위하면서 각종 체제 개혁을 도모하여 양나라의 안정적 기반을 닦았다. 다만, 동태사(同泰寺)를 비롯한 사찰을 창건해 사신(捨身) 행위를 하며 평소 가사를 입어 보살황제로 칭해질 정도로 불교를 지나치게 혹신한 나머지 내부의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무제가 사망 뒤 동위의 무장인 후경(侯景)이 투항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폐위하는 등 상당한 혼란에 빠뜨려 멸망의 길을 걸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 “소량” 참조.
[A-00-274]고조(高祖)
고조는 양나라 건국자 무제의 묘호. 왜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A-00-275]법흥왕(法興王)
신라 제23대 왕. 제22대 지증왕의 맏아들. 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立宗)갈문왕의 형이다. 어머니는 박씨로서 연제부인. 왕비 역시 박씨 보도(保刀)부인이다. 즉위 당시의 이름을 중국 측 기록인 「양서(梁書)」, 「남사(南史)」 등에서는 모진(募秦)이라 하였고, 「책부원귀(冊府元龜)」를 비롯한 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잘못 베껴 모태(募泰)로 표기한 곳도 있다. 539년의 「울산천전리서석(蔚山川前里書石)」 추명(追銘)에서는 법흥왕을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이라 하여 모진이 원래의 이름이었음을 입증해 준다. 524년의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에서도 법흥왕을 역시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 하여 모(무)진이 원래 신라식 이름의 음차(音借)였음이 밝혀졌다. 한편 법흥왕명을 원종(原宗)이라 한 것도 모진, 무즉지, 모즉지를 훈차한 데에 따른 표기이다. 법흥왕을 왕력편에서는 시호라 하면서 신라의 시호제가 이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이는 535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을묘명에 보이는 ‘성법흥대왕절(聖法興大王節)’이란 명문을 통해 생존 당시 사용한 왕명임이 확인됨으로써 잘못임이 드러났다. 법흥왕 대 후반기부터 왕호가 매금왕으로부터 대왕(大王) 또는 태왕(太王)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국왕의 위상이 이전과는 현저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해된다. 법흥왕은 불법을 일으켰다는 뜻을 지닌 왕명으로서, 승려 등 주로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사용되다가 정식 왕명으로 정착하게 된 것 같다. 거기에는 전륜성왕 의식이 밑바탕에 깔렸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 “법흥대왕” 참조.
[A-00-276]안장왕(安藏王)
고구려 제22대 왕. 이름은 흥안(興安), 시호는 안장왕. 문자왕의 장남으로 재위 7년(498)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519년 즉위하였다. 재위 2년(520) 남조의 양나라에 의해 영동(寧東)장군으로, 북조의 위나라에 의해 안동(安東)장군으로 책봉되었다. 문자왕의 뒤를 이어 북조와 남조 양자를 대상으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백제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오곡(五谷)의 싸움에서 싸워 이기고 한강 유역의 개백(皆伯)까지 진출하자 한씨(漢氏) 미녀가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까닭에 이 지역은 왕봉(王逢)으로 불렸다. 안장왕은 재위 13년 만인 531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양서」나 「남사」에는 즉위한 지 8년째인 양무제 보통(普通) 7년(526)에 죽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소개하면서 중국 사서의 기록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 권17 계체기(繼體紀) 25년(531) 12월조에는 구체적 사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안장왕이 피살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이 기사는 당시 고구려 내정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음을 시사해준다.
[A-00-277]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제25대 무령왕의 아들. 이름은 명(明) 또는 명농(明穠).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한다. 다만 처음에는 성명왕이라 하였다가 성왕으로 고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성왕 즉위년조에는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여 국인들이 성왕으로 칭하였다 한다. 성왕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 당시에 이미 그처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책에서는 사망한 뒤 시호를 성왕이라 하였다고 하여 모순된다. 이로 보면 생존 시의 왕명을 그대로 이어서 시호로 삼은 특이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아마도 성왕은 불경에 나오는 전륜성왕을 모방한 듯하다. 당시 백제가 남조의 양과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무제(武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중국에서는 전륜성왕을 성왕이라 하지 않고 법왕(法王)이라 불렀다고 하여 이를 의심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백제식의 변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전륜성왕 의식은 신라의 법흥왕이나 진흥왕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의 뜻을 이어받아 한강 유역의 탈환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일단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서 538년 협소한 웅진을 벗어나 사비로 계획적인 천도를 단행하였다. 한편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에 골몰한 나머지 당시 가야 방면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낙동강 하류 중심으로 차츰 진출해 영역 확장을 도모하는 신라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성왕은 신라와 가야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편성해 한강 유역 진출에 일시 성공하였으나 신라의 책략에 말려들어 즉시 퇴각하였다. 554년 그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관산성(管山城) 싸움이 벌어졌다. 백제가 먼저 일단의 승리를 거두자 성왕은 총사령관인 아들 여창(餘昌)을 격려하기 위하여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왕도로부터 가장 직선거리를 취해 전장으로 나아가다가 매복한 신라 병력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성왕의 몸통은 백제로 보내고 머리만 따로 신라 왕경으로 가져와 북청(北廳), 즉 도당(都堂)의 계단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군의 소위 중하총(中下塚) 내부가 무령왕릉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여겨 흔히 성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이후 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성왕” 참조
[A-00-278]원종(原宗)
법흥왕의 원래 이름. 음차인 모즉지, 무즉지, 모진을 한문식으로 훈차한 표기이다. 본서 권3 흥법편 「원종흥법염촉멸신(元宗興法厭髑滅身)」조에는 표제어로서 원종이 제시되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 “법흥대왕” 참조.
[A-00-279]「책부원귀(冊府元龜)」
북송대 왕흠약(王欽若) 등이 황제 진종(眞宗)의 명을 받아 1013년 완성한 전체 1,0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유서(類書)이다.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당 말 오대까지의 정치 등 다방면을 다룬 일종의 백과사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신라와 관련한 내용은 권996 외신부(外臣部)에 실려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 “책부원귀” 참조.
[A-00-280]시호(諡號)
이미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살았을 때의 공적이나 업적 등을 근거로 추증(追贈)하는 칭호. 시호 사용 방식이나 시점은 나라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장지(葬地)를 갖고 지으나 이때부터 재위할 때의 업적이나 특징을 근거로 해서 시호를 지음이 한동안 일반화되었다. 백제에서는 한결같지는 않아 무령왕처럼 재위 시의 왕명과는 다르게 따로 시호를 지은 경우도 있고 성왕처럼 왕명을 그대로 시호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신라의 경우 시호 사용 첫 시점에 대해서는 본서 왕력편에서는 법흥왕이라고 한 반면 기이편 「지철로왕」조에서는 지증왕 대부터라 하여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5년조에서도 지증왕 대부터 시호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과거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왕명을 시호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법흥왕’은 재위 기간인 535년 작성된 「울산천전리서석」 을묘명에 보이며, 제24대 진흥왕부터 제28대 진덕왕까지는 중국 측의 당대 기록에서도 등장하므로 이들은 시호가 아니라 재위 당시에 사용한 왕명임이 분명하다. 특히 진흥왕의 이름은 568년의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등 두 순수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료에 근거하는 한 무열왕(武烈王)이 신라 최초의 시호가 된다고 봄이 정확하다. 바로 이 무렵 태종이란 묘호(廟號)도 함께 사용되었는데 양자는 당시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시대적 상황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A-00-281]애공사(哀公寺)
경주 분지 동쪽의 선도산(仙桃山, 西岳) 아래에 있던 사찰. 언제 세워진 것인지, 구체적 위치가 어디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법흥왕을 추선하기 위한 사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같은 왕력편에서 진지왕릉 역시 “애공사 북쪽에 위치한다.”라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릉까지 애공사 북봉에 있다고 하므로 그처럼 간주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 방면 일대에 여러 왕릉이 조영된 뒤 이들을 기리기 위한 용도의 애공사가 들어섬으로써 여러 왕릉의 위치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활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애공사” 참조.
[A-00-282]무덤은 애공사(哀公寺)의 북쪽에 있다.
신라 왕릉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기록이다. 본 왕력편에서는 나물왕릉의 위치 관련 기록이 최초이지만 왕릉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 대부분 경주 분지 중심부의 대릉원 일대에 공동으로 조영되었는데, 이는 당시 공동체적 지배 질서가 강하게 작동하던 부체제 단계였음을 반영한다. 당시 지배층은 고총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독특한 무덤인 적석목곽분을 공유하였다. 법흥왕릉이 선도산 자락에 조영되는 시점을 신호탄으로 지배 세력의 무덤은 대체로 왕경 중앙부의 공동묘지로부터 벗어나 각각의 집단별로 주변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 특히 국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의 공동 묘역은 선도산 자락 일대에 조성되었다. 법흥왕릉 관련 기록은 그런 실상을 반영하는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현재 서악동 고분군으로 불리는 선도산 자락에는 남북으로 4기의 무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왕릉으로서 그 가운데 하나가 법흥왕릉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이로부터 아래로 백여 미터 떨어져 태종 무열왕릉이 위치하며, 다시 그로부터 백여 미터 아래에는 두 기의 고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들 두 무덤 가운데 작은 것은 김양(金陽)의 것으로 의견의 합치를 보이나 큰 것의 주인공은 김인문과 김유신 무덤으로 엇갈려 논란이 되고 있다. 다만 현재 사적 제176호로 지정된 법흥왕릉은 선도산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비정된 기록에 근거하고 있으나 실제와 어긋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A-00-283]파도(巴刀)부인
제23대 법흥왕의 왕비. 성은 박씨. 「삼국사기」에서는 보도(保刀)라 하였다. 539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추명(追銘)에는 부걸지(夫乞支)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부걸지를 뒷날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화(雅化)시켜 ‘파도’ 혹은 ‘보도’라고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A-00-284]출가(出家)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됨을 뜻한다. 파도부인의 출가는 불교가 공인된 뒤 여성으로는 최초의 사례이다. 아마도 법흥왕은 남조 양나라 무제처럼 보살제(菩薩帝)로 자처하면서 출가해 면류관을 벗고 법복을 입었는데 법명은 법운(法雲)이며 자를 법공(法空)이라 하였다. 파도부인도 법흥왕을 본받아 최초의 비구니 사찰인 영흥사(永興寺)의 창건을 주도하고 완공된 뒤 출가해 거기에 주석하면서 생을 마쳤는데 법명을 법류(法流) 또는 묘법(妙法)이라 하였다.
[A-00-285]법류(法流)
출가한 법흥왕비 파도부인의 법명. 묘법이라고도 한다. 본서 권3 흥법편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髑滅身)」조에도 법류(法流)라고 한 사실이 확인된다. 같은 책 왕력편의 「효성왕」조에는 효성왕이 742년 사망하였을 때 법류사에서 화장하여 그 뼈를 동해안에 뿌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A-00-286]영흥사(永興寺)
제23대 법흥왕 대인 535년에 세워진 신라 최초의 비구니 사찰. 법흥왕비와 진흥왕비가 주석하였다. 특히 진흥왕비는 진흥왕 사망 이후 줄곧 영흥사에 머물다가 614년(진평왕 36) 이 절에서 사망하였다. 영흥사는 통일기에 처음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사찰로서 설정된 이른바 7대 성전사원(成典寺院) 가운데 하나로서도 명맥이 이어졌다. 현재 구체적 위치는 남천 끝자락의 북쪽인 사정동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 “영흥사” 참조.
[A-00-287]율령(律令)
율령은 형벌법인 ‘율’과 행정법인 ‘영’으로 구성된 성문법 체계. 중국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각각 정비되다가 3세기 후반 서진(西晉)에 이르러 하나의 체계로서 결합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 시대에 국가 체제가 갖추어져 가는 과정에서 불문법, 관습법만의 운용으로 한계에 부닥쳐 성문법적 체계로 전환하면서 중국식 율령을 수용하였다. 삼국의 율령 수용 시점이나 배경은 국가마다 달랐지만 지배 체제의 성립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신라에서는 520년(법흥왕 7) 율령을 반포하였으나 그 성격이나 내용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긍정론은 법흥왕 대 반포한 율령을 글자 그대로 율과 영을 함께 갖춘 온전한 형식으로 보는 반면, 부정론은 관료의 의관제(衣冠制)나 공복제(公服制)와 관련된 지극히 한정적인 형식에 그친 것이라 이해하였다. 전자는 오래도록 그를 뚜렷이 입증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달리 없는 점이 한계였다. 반면 후자는 6세기 초 신라의 정치․사회적인 발전 정도를 매우 낮추어 보려는 입장에서, 관료제는 물론 6부나 17관등조차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였음을 전제로 한 추정이었다.
그런데 550년 무렵 건립된 「단양신라적성비」에서 17관등제가 성립되었음은 물론 국법(國法), 특히 구체적 내용은 간파하기 어려우나 토지 경영과 관련된 전사법(佃舍法)이라는 명칭이 확인됨으로써 법흥왕 대 율령이 율과 함께 영을 온전히 갖춘 법령이었을 공산이 커졌다. 1988년 발견되어 크게 주목을 끈 524년의 「울진봉평신라비」에서는 율령 반포 자체를 의미하는 대교법(大敎法)이라는 표현과 아울러 노인법(奴人法)이라는 편목의 존재까지도 확인되었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획죄(獲罪)란 표현과 함께 장육십(杖六十), 장백(杖百)과 같은 율의 집행 사례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법흥왕 대에 반포한 율령이 미흡하기는 하였을 터이나 율과 영을 함께 갖춘 법령이었음은 확실시되었다. 이후 정치․사회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판례나 시행 세칙인 격식(格式)까지 차츰 갖추어 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A-00-288]십재일(十齋日)
한 달 가운데 10일 동안 특정 부처와 보살을 염불함으로써 온갖 죄업(罪業)을 덜어내고 복을 받게 된다는 의식. 본서 의해편의 「원광서학」조에는 6재일이 보인다. 불교에서는 한 달 중 여러 천왕(天王)이 온 천하를 다니면서 관찰한다는 10일, 그날에 배정된 부처의 이름을 외우면 죄를 덜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A-00-289]살생을 금지하였고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에 기록된 528년(법흥왕 15)에 내려진 조치에 상응하는 기록이다. 바로 위의 십재일과는 별도로 내려진 법령이다. 직전인 527년(법흥왕 14)에 불교를 공인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서 천경림(天鏡林)에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지으려다 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이차돈(異次頓)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 죽임으로써 사태를 일단 무마시켰다. 이는 불교 공인을 놓고서 지배층 내부에서 상당한 대립과 갈등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거친 뒤 이듬해 살생 금지를 내린 조치는 불교 공인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 공인 시점이 527년이 아닌 이듬해 528년임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인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반대하는 세력과의 대결 구도에서 마침내 법흥왕이 승리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A-00-290]사람들을 출가시켜 승려가 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 처음 승려를 출가시킨 사례로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4년(544) 흥륜사 창건을 마무리 지은 뒤 백성들을 출가시켜 승니(僧尼)가 되도록 허용한 사실을 손꼽을 수 있다. 다만 그에 앞서 법흥왕 대에 해당하는 535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을묘명(乙卯銘)에는 비구승과 사미승이 함께 보인다. 당시 벌써 일부 승려의 위계 체계까지 일정 정도 갖추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들이 국가가 정식으로 승인해준 것인지 어떤지는 판단하기가 곤란하다. 공인 이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사례로는 모록(毛祿)의 여동생이 있다.
[A-00-291]건원(建元)
건원은 원래 연호를 정한다는 뜻이다. 이와 동시에 법흥왕 대에 사용한 신라 최초의 연호 자체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23년(536)조에 처음 연호 사용을 시작하였으며 이때를 건원 원년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연호는 원래 하늘의 뜻을 전달받는 황제만이 칭할 수 있다고 인식한 데서 마련되었는데, 법흥왕이 연호를 내세운 밑바닥에도 그와 같은 인식이 깔려있음을 뜻한다. 중국에서 연호가 정착되어가면서 대체로 1세 1연호가 하나의 원칙이었으나 거의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당 고종이나 측천무후의 재위 기간에는 특이하게도 수십 개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신라의 경우에는 다음 국왕이 즉위하자마자 즉각 새 연호를 따로 내세우지 않고 전대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건원도 법흥왕 이후 진흥왕이 재위 12년(551) 친정하면서 개국(開國)으로 바꾸기까지 도합 15년에 걸쳐서 사용되었다.
[A-00-292]흥안(興安)
고구려 제22대 안장왕의 이름. 중국의 사서나 「일본서기」에서는 이를 근거로 왕명을 안(安)이라고 불렀다.
[A-00-293]명농(明穠)
백제 제26대 성왕의 원래 이름. 명이라고도 하였다.
[A-00-294]사비(泗沘)
금강 유역에 위치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한다. 백제 제26대 성왕은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오늘날의 충남 부여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사비” 참조.
[A-00-295]남부여(南扶餘)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뒤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한 것처럼 지배층들은 부여족의 일파로서 강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북쪽 부여 방면에서 내려와 처음 근거지로 삼았던 한강 유역 일대를 회복해 중흥을 도모한다는 의지의 표명으로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것 같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남부여” 참조.
[A-00-296]구형왕(仇衡王)
가락국의 제10대 왕이자 마지막 왕.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9대 겸지왕. 어머니는 각간 출충(出忠)의 딸인 숙녀(淑女).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인 계화(桂花)이다. 두 사람 사이에 노종(奴宗 또는 世宗), 무덕(武德, 茂刀), 무력(武力 또는 茂得) 등 세 아들을 두었다. 신라가 계속 압박을 가해 오자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한 구형왕은 식솔들과 함께 내탕금을 갖고서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구형왕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어 상등(上等) 지위와 함께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부여받았다. 동생인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이 남아서 식읍을 관리하였다.
신라로 편입된 가락국계는 비주류로서 온갖 질시와 견제 속에서도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무력은 아들 서현, 손자 김유신으로 이어 가면서 군공을 세우고 마침내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는 태종 무열왕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여 문무왕을 낳았다. 신라 통일왕조의 출발인 중대는 사실상 이들 두 집단의 연합 정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무왕이 통일 직후 조서를 내려 수로왕이 모계로서 자신의 15대조이므로 종묘에 합사해 제사 지내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조 “구형왕” 참조.
[A-00-297]숙녀(淑女)
가락국 제9대 겸지왕의 왕비이자 제10대 구형왕의 어머니. 각간 출충(出忠)의 딸이다.
[A-00-298]13년간
실제로 계산하면 12년이 맞다. 「가락국기」에는 구형왕의 재위 기간을 42년이라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A-00-299]중대통(中大通)
남조 양나라 무제의 연호. 특이하게도 왕력 전편에 걸쳐서 연대를 나타낼 때 간지를 사용함이 일반적이나 오로지 여기서만 양나라의 연호로 나타내고 있다.
[A-00-300]안원왕(安原王)
고구려 제23대 왕. 「일본서기」에는 향강상왕(香岡上王)이라고 하였다. 이름은 보영(寶迎) 또는 보연(寶延). 영(迎)과 연(延)의 자형이 비슷하여 어느 한쪽이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빚어낸 착오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 사서에서 대체로 안원왕의 왕명을 연(延)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연이 올바를 듯하다. 아버지는 제21대 문자왕. 제22대 안장왕은 형이다. 안장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즉위하였다고 하나, 그가 피살되었다면 안원왕의 즉위 과정 자체는 석연치 않은 측면이 엿보인다. 「양서」, 「북사」, 「남사」 등에는 안장왕의 아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위 15년째인 545년 외척 중심의 귀족들이 연루된 대규모 내란이 벌어진 점을 고려하면 특히 더 그러하다.
[A-00-301]보영(寶迎)
안원왕의 원래 이름. 「삼국사기」에서는 보연(寶延)이라 하였다. 중국의 사서에서도 모두 연(延)이라 한 사실로 미루어 보연 쪽이 올바를 듯하다.
[A-00-302]진흥왕(眞興王)
진흥왕(眞興王): 신라 제24대 왕.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立宗)갈문왕,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只召)부인. 다만 왕력편에서 지소를 식도(息道) 또는 색도(色刀)라고도 하였으나 왕비인 사도부인과 혼동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제23대 법흥왕에게는 조카이면서 외손자이기도 한 셈이다. 왕비는 박씨로서 모량부 소속 영실(英失) 각간의 딸인 사도(思道)부인이다.
진흥왕의 원래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종(深麥宗)이다. 법흥왕에게 아들이 없어 조카 또는 외손의 자격으로 즉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때의 나이가 7세 또는 15세라는 서로 다른 기록이 있으나 561년의 「창녕진흥왕비(昌寧眞興王碑)」 첫머리에 보이는 “과인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寡人幼年承基]”라는 표현을 주요 근거로 전자라고 봄이 일반적이다. 이로 말미암아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성년이 될 때까지 이사부(異斯夫) 등 명신의 도움을 얻어 섭정하였다. 「울산천전리서석」 추명에 의하면 진흥왕은 즉위하기 직전인 539년 자신의 어머니인 지소왕비와 외할머니 보도태왕비에 이끌려 천전리 계곡으로 갔는데, 바로 몇 해 앞서 사망한 그의 아버지 사부지(徙夫智), 즉 입종갈문왕을 추모하려는 행차였던 것 같다. 아버지 입종이 먼저 사망하였기에 진흥왕이 어린 나이임에도 즉위할 수 있게 된 듯하다. 568년의 「황초령진흥왕순수비(黃草嶺眞興王巡狩碑)」와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는 진흥태왕이라고 하여 진흥왕이 시호가 아닌 생존 시의 왕명이었음이 확인된다. 이는 북제서(北齊書) 권8 무성제기(武成帝紀) 하청(河淸) 4년(565)조에 신라왕으로 책봉하면서 왕명을 김진흥(金眞興)이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진흥왕 대에는 낙동강 서안 중심의 가야 지역 전체는 물론 한강 유역 진출에 성공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함경도의 마운령 일대에까지 영역을 넓힘으로써 통일 이전 최대의 판도를 구가하였다. 이를 토대로 사방이라는 천하관을 갖고 황제라고 자처하면서 왕도 정치를 표방하였다. 한편 인도의 아쇼카를 능가하는 전형적인 전륜성왕으로 자처하였다. 호국 사찰인 황룡사에 장육상을 조영한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흥왕은 새로운 영역에 어우러지도록 내부의 지배 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말년에는 출가하여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진흥왕」조 “진흥왕” 참조.
[A-00-303]양원왕(陽原王)
고구려 제24대 왕. 이름은 평성(平成). 중국 사서에는 왕명을 성(成)이라고 하였다. 양원왕은 시호인데 양강왕,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마치 고구려 초기에 장지를 시호로 삼던 상황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짙다. 안원왕의 맏아들로서 재위 3년(533) 태자로 책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순조롭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안원왕이 재위 15년(545)째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양서」와 「남사」에서는 그와 달리 양무제 대청(大淸) 2년, 즉 548년에 사망하였다고 하여 3년의 시차를 보인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가 그를 소개하면서 잘못이라 지적하였다. 한편 「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6년(545)조와 7년(546)조에는 안원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후계를 두고 다툼이 격렬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안원왕의 세 부인 가운데 정(正)부인에게는 아들이 없고 중(中)부인과 소(小)부인에게는 각기 아들이 있어 이들의 외척인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이 각각 자신들의 외손을 즉위시킬 의도로 벌였던 싸움이다. 마침내 전자가 승리하였는데 이때 후자 가운데 죽은 사람이 2천 명에 이를 정도로 다툼의 규모가 엄청났다. 그런데 당시 승리한 중
[A-00-304]삼맥종(彡麥宗)
진흥왕의 어린 시절 이름. 심맥종(심맥부지)이라고도 한다. 539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추명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진흥왕」조 “진흥왕” 참조.
[A-00-305]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 제22대 지증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23대 법흥왕의 동생. 이복동생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왕비는 지소(只召)부인. 지소는 법흥왕의 딸이므로 입종에게는 조카딸이기도 한 셈이다. 입종의 딸은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銅輪)태자의 비가 된 만호(萬呼)부인으로서 제26대 진평왕에게는 어머니가 된다. 그에게는 그 밖에 숙흘종(肅訖宗)이라는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숙흘종의 딸인 만명(萬明)은 금관국계인 김서현(金舒鉉)과 혼인하여 김유신(金庾信)을 낳았다. 말하자면 입종은 김유신에게는 외증조부가 되는 셈이다. 525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원명(原銘 또는 乙巳銘)에 보이는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사부지(徙夫智)갈문왕이 입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부지갈문왕은 524년의 「울진봉평신라비」에도 탁부 소속의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즉 법흥왕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는데 역시 사탁부 소속으로 되어 있어 「울산천전리서석」과 일치한다. 매금왕과 갈문왕이기는 하나 두 사람만 왕이라 칭하고 있으므로 당시 신라 지배 체제가 2왕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매금왕은 바로 직후 태왕으로 바뀌었으므로 양자 사이에는 정치적으로 뛰어넘기 힘든 간극이 존재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두 사람이 형제 사이이면서도 서로 소속 부를 달리한 점이다. 아버지인 지증왕이 사탁부 소속의 갈문왕이면서 매금왕이 된 사실과 함께 소속 부의 향방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는 당시 부의 성격이 단순한 행정구역이냐 아니면 정치적으로 반(半)독자성을 가진 단위 정치체이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진흥왕」조 “입종갈문왕” 참조.
※갈문왕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보주 “갈문왕” 참조.
[A-00-306]지소(只召)부인
제24대 진흥왕의 어머니. 제23대 법흥왕의 딸. 539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추명에는 지몰시혜(只沒尸兮)로 표기되어 있다. 진흥왕이 7세(혹은 15세라는 기록도 있다.)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지소는 명신 이사부 등의 도움을 받아 551년까지 섭정하였다. 이 기간 동안 흥륜사를 완공하고 승니의 출가를 허용하는 등 불교 홍포를 활발히 추진함과 동시에 최초로 신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국사」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당시 삼국 사이에 본격적으로 전운이 감돌자 핵심 중앙 군단인 대당(大幢)을 설치하고 지방민을 대상으로 삼천당(三千幢)이라는 군단을 편성하는 등 군사 조직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하였다. 이때 이를 감당할 만한 관료와 군관 양성을 겨냥한 원화제(源花制)를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551년 성년에 이른 진흥왕이 친정하면서 이를 화랑제로 바꾸어 다시 실행하여 정착시켰다. 「울산천전리서석」에는 지소왕비가 진흥왕이 즉위하기 직전 해인 539년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어머니인 무즉지태왕의 보도왕비와 아들인 심맥부지와 같이 남편인 입종갈문왕이 14년 전인 525년 여동생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과 함께 다녀간 서석곡(書石谷)에 행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실 핵심 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입종에 대한 일종의 추모행사였다.
[A-00-307]양강왕(陽崗王)
양원왕 시호의 다른 표기. 원(原)과 강(崗), 강(岡)이 같은 의미로 혼용된 듯하다.
[A-00-308]평성(平成)
양원왕의 원래 이름. 중국 사서에서는 관례대로 평을 제외한 성만을 왕명으로 여겼다.
[A-00-309]나라가 망하였다.
532년에 가락국 즉 금관국이 멸망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여타 10여 개의 가야 여러 나라는 이후 562년까지 존속하였다. 「가락국기」는 562년 대가야의 멸망 기사와 혼동하여 진흥왕 대에 멸망하였다고 하였으나 왕력편에서는 이를 근간으로 삼으면서도 이 부분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A-00-310]모량리(牟梁里)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의 중심지에 있던 리(里)를 지칭. 여기서는 인명의 앞에 붙인 소속 부를 가리키므로 모량리가 아닌 모량부의가 잘못일 여지도 보인다. 모량부는 점량부(漸梁部)라고도 하는데, 524년의 「울진봉평신라비」나 7세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단석산 마애불조상기」에서는 잠탁부(岑喙部)로 나온다. 량(梁)과 탁(喙)은 모두 닭(鷄)의 뜻으로서 훈차와 음차에서 비롯된 표기 방식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모량부는 6부 가운데 양부 및 사량부와 함께 량, 즉 닭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하필이면 집단의 거주 구역이 서천(西川: 형산강) 너머에 자리 잡았으며 무덤도 경주 분지의 중앙부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지증왕이 즉위한 뒤 이 집단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의도로 혼인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서 왕비로 등장하는 박씨가 바로 그들로 보인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모량부” 참조.
[A-00-311]마지막에는 머리를 깎고서 죽었다.
신라 국가가 공식적으로 출가를 승인하고 승니가 되도록 허용한 첫 사례는 544년(진흥왕 5)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완공한 직후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재가불자로서 출가해서 법명을 가진 첫 사례는 법흥왕과 그의 왕비 보도부인이다. 여기에는 보살제로 불린 양나라 무제의 영향이 컸던 듯하다. 진흥왕도 어릴 때부터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역시 법흥왕을 본받아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표방하였다. 말년에 머리를 깎고서 승복을 입고 생활하였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불렀다. 왕비 사도(思道)부인도 법흥왕비의 사례를 뒤이어 출가해서 영흥사에서 머물다가 614년(진평왕 36)에 사망하였다.
[A-00-312]후경(侯景)
동위(東魏)의 무장 출신으로서 양나라에 투항하였으며 얼마 뒤 양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양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간문제를 내세웠다가 곧장 살해하였다. 이후 잠시 예장왕(豫樟王) 소동(蕭棟)을 즉위시켰다가 곧바로 그에게서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칭하였다. 후경은 552년 형주자사 소역(蕭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럼에도 왕력편에서는 후경을 양의 황제인 듯이 잘못 다루고 있다.
[A-00-313]태시(太始)
후경이 잠시 한이라 칭하면서 황제가 되었을 때 사용한 연호.
[A-00-314]개국(開國)
진흥왕이 재위 11년째인 551년 처음으로 사용한 연호. 568년 대창(大昌)으로 바꿀 때까지 17년간 사용하였다. 그 직전까지는 법흥왕이 처음 내세운 연호인 건원을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개국으로 고친 것은 진흥왕이 성년이 되어 친정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연호를 ‘나라를 열다’라는 뜻의 개국을 내세운 것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신라 국가를 새롭게 만들려는 강력한 의지를 담으려 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의도대로 진흥왕은 가야 지역 전체를 영역으로 편입하였고 한강 유역 진출에도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고구려 영역 깊숙한 데까지 침투해 최대의 판도를 구가하였다. 이는 개국이란 연호에 걸맞은 성과였다고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삼국 통일의 토대를 마련한 공적을 진흥왕에게 돌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A-00-315]신미에서 시작하여 17년간 썼다.
중국식의 연호 표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 기간을 함께 제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하 진흥왕 대에 사용된 태창이나 홍제의 경우도 같은 양상이다.
[A-00-316]위덕왕(威德王)
백제 제27대 왕. 제26대 성왕의 맏아들이다. 이름이 창(昌)이어서 생전에는 창왕으로 불렸다. 왕력편에서는 명(明)이라고도 하였다. 다만 이 명을 아버지 이름의 잘못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버지 성왕과는 다르게 위덕왕은 시호로 보인다. 부여 능산리의 절터에서 출토된 567년의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이나 577년의 왕흥사지(王興寺址) 출토 사리함에는 왕명을 ‘창왕’이라고 한 데서 짐작된다. 성왕의 태자로 책립되어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특히 백제의 발상지인 한강 유역 탈환에 대한 희구가 최종 단계에서 연합 세력인 신라의 배반 때문에 좌절되자 태자 여창은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강경하게 억누르면서 보복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554년 관산성 싸움에서 무려 3만의 병력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대패하고 아버지 성왕마저 전사하는 일대 위기의 국면을 맞았다. 여창은 자신의 고집으로 실패한 것이라 여겨 곧바로 즉위하지 않고 출가 수도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는 책임론 때문에 그의 즉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약간의 공위(空位) 기간을 거쳐서 즉위하였다. 자신의 누이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마련한 「창왕명석조사리감」 명문에 「삼국사기」의 기년과 1년의 오차를 보임은 그런 사정을 방증한다. 즉위한 뒤 한동안 신라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체로 주변국과의 외교에 힘을 쏟으면서 내부 안정을 도모하였다. 상대적으로 왕권이 미약해진 분위기를 틈타 이성(異姓)의 대성팔족(大姓八族) 귀족들이 급부상함으로써 백제 정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A-00-317]창(昌)
위덕왕의 원래 이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567년의 「창왕명석조사리감」이나 왕흥사 절터에서 출토된 577년의 사리함 명문에도 창왕이라고 되어 있다. 본래의 이름을 왕명으로 그대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덕왕은 시호이다.
[A-00-318]갑술년(554)에 즉위하여
본 왕력편과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5) 위덕왕 즉위년조에는 위덕왕이 갑술, 즉 554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18년조에는 557년 즉위하였다고 하여 3년의 시차를 보인다. 이처럼 후자의 경우에 따르면 무려 3년간의 공위(空位) 기간이 존재한 셈이 된다. 그래서 구체적인 실상을 두고서 논란이 되고 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567년의 「창왕명석조사리감」에는 창왕 13년을 정해년(丁亥年)이라 하였으므로 위덕왕의 즉위는 555년으로 되는 셈이다. 이를 두고 공위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견해, 1년의 공위만을 인정하는 견해, 즉위기년법의 문제라고 보는 견해, 성왕의 사망 시점을 「일본서기」에 따라 554년 12월로 받아들여 유월칭원법상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견해 등 다양한 의견들이 엇갈려 있다.
[A-00-319]진(陳)
557년 진패선(陳覇先)에 의해 건국되어 589년 수나라에 병합될 때까지 5대 32년 동안 존속한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패선은 후경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면서 급작스레 부상하였다. 당시 집권자였던 왕승변(王僧弁)을 타도하고 경제를 잠시 추대하였다가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에 올라 진을 건국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4 의해 제5 「원광서학」조 “진나라” 참조.
[A-00-320]고조(高祖)
고조는 진의 건국자 무제의 묘호. 왜 묘호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A-00-321]평원왕(平原王)
고구려 제25대 왕. 시호이며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평강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양성(陽成 또는 陽城). 「수서」, 「당서」, 「북사」 등에서는 탕(湯)이라고 하였다. 양원왕의 맏아들. 557년(양원왕 13)에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2년 뒤 즉위하였다. 고구려는 남조와 북조의 두 왕조들을 대상으로 전통적인 등거리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여 왔다. 그러다가 중원 지역에 새로운 왕조인 수(隋)가 등장하자 고구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재위 28년(586)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A-00-322]평강(平岡)
평원왕의 다른 표기. 강(岡)과 강(崗)이나 원(原)은 같은 뜻이어서 혼용된 듯하다.
[A-00-323]「남사」에서는 고양(高陽)
「남사」에는 고양이란 왕명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왕력 찬자의 착각인 듯하다. 관련 사항은 본조 각주 “남사” 참조.
[A-00-324]태창(太昌)
진흥왕이 개국 다음에 사용한 연호. 진흥왕은 재위 29년째 되던 해인 568년 연호를 개국 대신 태창으로 바꾸어 4년 동안 사용하였다. 태창의 뜻 그대로 신라를 안팎으로 크게 번창시키겠다는 의지와 희구를 담은 연호로 보인다. 바로 그해 10월 21일에 세워진 「마운령진흥왕순수비」에는 태창이란 연호의 실제 사용 사례가 확인된다. 앞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같은 해 두 달 앞서 세운 「황초령진흥왕순수비」에도 역시 대창이라는 연호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껏 금석문상에서 신라 연호로 확인된 유일한 사례이다.
[A-00-325]홍제(鴻濟)
진흥왕이 내세운 연호 가운데 마지막의 것. 재위 33년째 되던 572년 정월에 태창 연호를 홍제로 고쳤다. ‘널리 구제한다’는 뜻이므로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바로 두 달 뒤인 3월에 동륜태자가 사망하였다. 이로 미루어 그런 연호 사용의 밑바탕에는 내부 안정과 함께 태자의 치유에 대한 희구까지 담겼을지도 모른다.
[A-00-326]12년간 사용하였다.
홍제는 진흥왕 재위 33년째 되던 해부터 사용한 연호. 이후 제25대 진지왕(眞智王) 대에는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없으며, 진평왕 6년(584) 2월에 이르러서야 건복(建福)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기간을 모두 합쳐서 12년 동안 사용하였다고 한 것이다. 다만 왕력편에서는 진평왕이 건복으로 연호를 바꾼 사실은 빠뜨리고 싣지 않았다. 신라에서는 중국과는 다르게 전왕의 연호를 신왕이 이어서 사용하기도 한 점에서 운용상 나름의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A-00-327]진지왕(眞智王)
신라 제25대 왕. 아버지는 제24대 진흥왕. 어머니는 박씨로서 모량부 출신 영실 각간의 딸 사도부인. 왕비 또한 박씨로서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知刀)부인이다. 지증왕 이후 진지왕까지 4대에 걸쳐서 왕비가 모두 박씨라는 점은 각별히 주목해볼 사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사륜(舍輪), 금륜(金輪), 철륜(鐵輪) 등으로 불리었는데 모두 ‘쇠로 만든 수레바퀴’를 뜻하는 다른 표기들이다. 진지왕의 형은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銅輪)이다. 아마도 전륜성왕 의식에서 만들어진 이름으로서 금, 은, 동, 철 등 금속의 진귀함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차등하려는 의도에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륜과 은륜의 구체적 인물이 누구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동륜은 566년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6년째 되던 572년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륜이 둘째이면서도 장조카인 백정(白淨), 즉 진평왕을 대신해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재위 4년째 되던 579년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음란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인들에 의해 폐위 당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비속(卑屬)은 정치적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뒷날 손자인 김춘추(金春秋)가 힘들게 즉위함으로써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고 마침내 중대(中代)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주인공이 되었다. 진지왕은 폐위되었지만 중대에 이르러 복권된 셈이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도화녀 비형랑」조 “진지대왕” 참조.
[A-00-328]사륜(舍輪)
사륜은 제25대 진지왕이 즉위하기 전의 원래 이름. 아버지 진흥왕의 전륜성왕 의식에 따라서 작명되었다. 사륜은 금륜, 은륜, 동륜 다음 제일 하위의 전륜성왕으로서 철륜(鐵輪)을 음차한 표기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도화녀 비형랑」조 “사륜왕” 참조.
[A-00-329]금륜(金輪)
진지왕의 원래 이름인 사륜을 훈차한 것. 금륜의 금은 철을 간혹 의미하는데 간혹 글자 그대로 황금의 뜻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A-00-330]영실(英失)
제24대 진흥왕 왕비인 사도부인의 아버지. 모량부 출신으로서 박씨이다. 제25대 진지왕에게는 외조부가 되는 셈이다. 그 밖에 이와 관련된 다른 사실은 기록상 보이지 않는다.
[A-00-331]식도(息途) 또는 색도(色刀)
식도는 진흥왕의 왕비 이름. 색도라고도 한다. 모량부 출신인 영실 각간의 딸. 「삼국사기」에서는 사도(思道)부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표기 방식에 따른 차이인 듯하다.
[A-00-332]지도(知刀)부인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왕비로서 기오공의 딸.
[A-00-333]기오공(起烏公)
제25대 진지왕의 왕비인 사도부인의 아버지. 성이 박씨라는 사실만 확인될 뿐 그 밖에 달리 알려진 사실은 없다. 기오공의 출자나 관등 보유 등과 관련한 사항이 보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왕비로서 기오공의 딸.이지 않아 과거 막연하게 미천한 신분일 것으로 추정해 진지왕이 폐위된 요인으로 삼거나 그의 후예들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다고 보는 등 한때 골품제의 문제와 관련하여 집중적 조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봄이 일반적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도화녀비형랑」조 “기오공”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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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334](진지왕의) 무덤
재위 4년 만에 폐위된 진지왕의 무덤을 왕력편에서는 애공사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에서나 왕력편에서 법흥왕의 무덤 위치를 애공사 북쪽(또는 북봉(北峯))이라고 한 것과 같다. 따라서 진지왕의 무덤도 법흥왕릉과 비슷한 곳에 위치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애공사의 구체적 위치나 창건 관련 기본적 사항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진지왕의 무덤을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기준을 달리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영경사와 애공사가 별개가 아닌 서로 인접하거나 같은 곳이라면 별달리 문제시될 게 없다. 진지왕의 아버지 진흥왕의 무덤 위치도 「삼국사기」에서는 역시 애공사 북봉이라고 하여 같은 곳임을 나타낸다. 이들의 구체적 위치를 결정지어 주는 것은 태종무열왕의 무덤이다. 이를 「삼국사기」에서는 영경사의 북쪽이라고 한 것이다. 진지왕처럼 영경사를 기준으로 나타난 사실이 주목된다. 무열왕릉은 현재 선도산 자락에 있는 석비의 이수(螭首)를 매개로 해서 신라 왕릉 가운데 위치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무덤이다. 이를 근거로 삼으면 진지왕릉은 서악동 고분군 중심부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4기 가운데 하나라고 추정하여도 무방하다. 다만 4기 피장자의 구체적인 주인공을 둘러싸고 크게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A-00-335]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왕. 원래 이름은 백정(白淨). 제24대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의 아들로서, 삼촌인 진지왕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재위 4년 만에 국인들에 의해 폐위당하자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萬呼), 만내(萬內) 또는 만녕(萬寧)부인으로 이름은 행의(行義). 처음 왕비(先妃)는 김씨 마야(摩耶)부인으로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 둘째 왕비(後妃)는 손씨(孫氏)로서 승만(僧滿)부인. 선비(先妃)와 후비(後妃)라고 칭한 사실로 미루어 이들이 동시적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진평왕이 당시로서는 이례적이다시피 할 정도로 54년이란 매우 긴 기간 동안 재위하여 첫째 왕비인 마야부인이 먼저 사망하자 새로 맞아들인 왕비가 승만부인이었던 듯하다. 그것은 마야부인이라는 이름이 석가모니를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그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사실로부터도 유추된다. 진평왕은 법흥왕과 진흥왕으로 이어지면서 일정 부분 목적을 성취한 전륜성왕 의식이 동륜태자의 사망, 진지왕의 폐위 등으로 더 이상 유지해 가기 어려워지자 자신 중심의 직계존비속(尊卑屬)을 석가모니의 일가족, 이른바 석가족(釋迦族)으로 여기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신 내세웠다. 그래서 스스로를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이라 하면서 자신의 왕비를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 불렀다. 두 동생 또한 각각 석가모니의 삼촌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라고 이름 지었다. 석가족 의식이 기대한 바의 성과를 거두려면 아무쪼록 아들, 즉 석가모니를 낳아야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딸만 둘(혹은 셋)을 낳고 말았다. 하지만 그처럼 자신의 일족을 석가족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신성가족(神聖家族) 의식으로부터 성골(聖骨) 관념이 출현하고 마침내 이를 명분으로 삼아 장녀인 덕만(德曼), 즉 선덕여왕의 즉위가 가능해졌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천사옥대」조 “진평대왕” 참조.
[A-00-336]백정(白淨)
즉위하기 이전 진평왕의 원래 이름.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천사옥대」조 “진평대왕” 참조.
[A-00-337]동륜왕(銅輪王)
제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를 지칭한다. 진흥왕의 장남으로서 566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6년 만인 572년 사망하였다. 이 기록이 동륜태자를 동륜왕이라고도 한 유일한 사례이나 사후 그처럼 불리기도 한 듯하다. 혹시 진평왕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봉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진흥왕은 안정적인 왕위 승계 체계를 확립할 필요성에서 처음으로 태자책봉제를 도입하여 장남인 동륜을 내세웠다. 그러나 동륜태자가 일찍이 사망함으로써 태자책봉제는 정착되지 못하였다. 이후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만 얻었으며, 여왕이 잇따라 즉위하는 등 태자책봉제가 다시 실시될 만한 겨를을 거의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즉위한 태종 무열왕이 각별히 관심을 갖고 크게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것이 태자책봉제의 안착이었다. 태종무열왕은 재위 2년째 되던 655년 장남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로서 처음 즉위한 사례이니 바로 문무왕이다. 이후 중대 국왕들은 태자의 책봉에 유난스럽게 집착을 보였다.
[A-00-338]만호(萬呼) 또는 만녕(萬寧)
동륜태자의 비이면서 진평왕의 어머니의 이름. 만내(萬內)라고도 한다. 입종갈문왕의 딸이다. 입종갈문왕에게는 두 아들 진흥왕과 숙흘종 외에 딸 만호가 있었다.
[A-00-339]행의(行義)
동륜태자비로 책봉된 만호의 원래 이름.
[A-00-340]마야부인(摩耶夫人)
제26대 진평왕의 첫 부인으로서 선덕여왕의 어머니. 아버지는 복승(福勝)갈문왕. 성은 김씨, 이름은 복힐구(福肹口)였으나 진평왕의 왕비가 된 뒤 마야부인으로 불리었다. 마야는 원래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 진평왕이 스스로 석가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이라고 자처하면서 왕비를 그처럼 불렀다. 이와 함께 자신의 두 동생을 갈문왕에 책봉하면서 정반왕의 동생 이름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라 하였다. 이는 진평왕이 자신의 직계 존비속을 석가모니 일족과 동일시해 신성시여긴 발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밑바닥에는 장차 남자 아이인 석가모니를 얻어 승계시키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진평왕에게 또 다른 왕비(後妃)로 승만부인(僧滿夫人)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마야부인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한 것 같다.
[A-00-341]복힐구(福肹口)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의 원래 이름. 하지만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비롯된 약간의 착란이 엿보인다. 「삼국사기」에서는 마야부인을 복승(福勝)갈문왕의 딸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탈자가 있었을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힐구가 복승갈문왕이 잘못 표기된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A-00-342]승만(僧滿)부인
진평왕의 두 번째 부인. 성은 손씨. 진평왕은 첫째 부인인 마야왕비가 사망한 뒤 재혼한 듯하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승만은 표기 방식이 다르나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승만경(勝鬘經)」과 관련해서 지어진 불교식 이름인 듯하다.
[A-00-343]손(孫)씨:
진평왕의 후비인 승만부인이 칭한 성씨.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는 이때 6부명을 개정하면서 대수부(大樹部)를 모량부(점량부)로 고치고 손씨 성을 부여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해 모량부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 손씨가 실재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따라서 손씨가 실제로 출현하기 훨씬 이전이므로 후대에 부회된 것으로 봄이 온당할 듯하다.
[A-00-344]영양왕(嬰陽王)
고구려 제26대 왕. 제25대 평원왕의 맏아들.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 평원왕 재위 7년(565)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590년 즉위하였다. 수(隋)가 589년 중국의 오랜 분열 시대를 마감해 통일국가를 이룬 뒤 주변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고구려도 그에 대비해 다방면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후방의 안정을 꾀해 백제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이때 역사서인 「신집(新集)」을 정리하는 등 내부의 정비도 도모하였다. 재위 말년 살수대첩을 비롯하여 세 차례에 걸쳐 수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물리쳤으나 엄청난 국력의 소모가 뒤따랐다. 이런 안팎의 긴장된 분위기는 결국 국왕권 기반의 약화로 이어져 연개소문(淵蓋蘇文)과 같은 신흥의 세력이 부상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보장봉노 보덕이암」조 “영양왕” 참조.
[A-00-345]평양(平陽)
제26대 영양왕의 일명.
[A-00-346]원(元)인데 대원(大元)
영양왕의 원래 이름.
[A-00-347]혜왕(惠王)
백제 제28대 왕. 제26대 성왕의 둘째 아들이면서 제27대 위덕왕의 아우. 본 왕력편에서는 위덕왕의 아들이라 하고 또 「수서」 등 중국의 사서에서는 위덕왕의 뒤를 여선(餘宣), 즉 법왕이 이은 것처럼 기록하여 혜왕을 누락시키기도 하였다. 이름은 계(季). 시호를 혜왕 또는 헌왕(獻王)이라 하였다. 위덕왕에게는 아좌(阿佐)태자란 아들이 있었는데 왜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또 577년 제작된 왕흥사지 출토의 사리함에는 이름 모를 어떤 왕자가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고 한다. 혜왕은 위덕왕의 명으로 왜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즉위할 때 이미 70세가 넘었다.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였다.
[A-00-348]계(季)
백제 제28대 혜왕의 이름.
[A-00-349]헌왕(獻王)
백제 제28대 혜왕의 또 다른 시호.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대에 김입지(金立之)가 찬문한 「성주사비(聖住寺碑)」의 비편에 보이는 ‘헌왕태자(獻王太子)’의 헌왕과 일치한다. 「숭암산성주사사적」에 의하면 성주사에는 원래 백제 법왕(法王)이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A-00-350]법왕(法王)
백제 제29대 왕. 제28대 혜왕의 맏아들. 다만 「수서」 등 중국 사서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하기도 하였다. 혜왕을 빠뜨린 셈이다.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법왕은 시호이다. 혜왕과 마찬가지로 재위 2년째에 사망하였다. 즉위하던 해 12월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는 놓아주었으며 어렵(漁獵) 도구를 태우도록 하는 등 불교 이념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혜왕과 법왕의 양대가 재위 기간이 매우 짧고 익산에서 살던 무왕(武王)이 그 뒤를 잇게 된 사실로 미루어 어떤 정변이 벌어졌을 공산이 크다. 신라 문성왕 대에 김입지(金立之)가 지었다는 「성주사비」의 비편에 보이는 ‘헌왕태자(獻王太子)’를 헌왕 즉 혜왕의 태자로 읽고 이를 즉위 전의 법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A-00-351]효순(孝順) 또는 선(宣)
백제 제29대 법왕의 이름.
[A-00-352]무왕(武王)
백제 제30대 왕. 원래 이름은 장(璋). 어릴 때에는 서동(薯童)으로 불렸다. 무강왕(武康王), 무광왕(武廣王),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고도 하였다. 왕비는 본서 기이편2 「무왕」조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善花)공주이다. 그러나 2009년 익산 미륵사 터의 서탑에서 출토된 539년의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는 왕후가 좌평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로 나온다. 당시 복수의 왕비가 존재하였을 여지를 보여준다. 「삼국사기」에는 제29대 법왕의 아들로서 즉위하였다고 하나 석연치가 않다. 그런 탓인지 왕력편에서는 아무런 혈연관계를 소개하고 있지 않다. 한편 「북사」에서는 위덕왕이 사망하자 무왕이 그의 아들로서 즉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수서」와 「한원」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는 혜왕과 법왕의 재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빚어진 착오로 보이나 무왕이 실제로 위덕왕의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본서 기이편2 「무왕」조에 어머니가 과수가 되어 왕도 남쪽의 못가에 살았는데 지룡(池龍)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는 설화나 무왕이 어릴 적에 마[薯]를 캐내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등 힘들게 생활한 것으로 묘사된 데서 유추할 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혜왕과 법왕의 재위 기간이 지극히 짧은 점, 불교식 시호인 법왕과는 달리 무왕의 시호가 유학적인 점 등은 무왕의 즉위 배경이 특이하였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무왕」조 “무왕” 참조.
[A-00-353]무강(武康)
백제 제30대 무왕의 다른 왕명. 중국 서진(西晉)에서 남제(南齊)에 이르는 이른바 육조(六朝) 시대에 일어난 관세음의 이적이나 영험담을 기록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광왕(武廣王)으로도 나온다. 관련 내용은 주352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무왕」조 “무왕” 참조.
[A-00-354]장(璋)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 어린 시절에는 서동이라고도 불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무왕」조 “무왕” 참조.
[A-00-355]서■(薯■)
백제 제30대 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 서동(薯童)으로 추정된다. 무왕이 즉위하기 이전 익산 지방을 생활 근거지로 삼고 마[서(薯)]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 데서 붙여진 듯하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무왕」조 “소명은 서동” 참조.
[A-00-356]영류왕(榮留王)
고구려 제27대 왕. 제25대 평원왕의 아들로서 제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건성(建成)이라고 하였다. 수가 멸망하고 당이 들어서자 우호 관계 회복에 적극 나섰다. 매년 사신을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당이 강요하는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환심을 사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628년에는 봉역도(封域圖)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당이 631년 고구려가 수와의 싸움에 승리해서 세운 전승 기념비라고 할 경관(京觀)을 헐자 위기의식을 느낀 고구려는 16년에 걸쳐서 천리장성을 쌓는 등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桓權)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렇지만 당은 꾸준히 고구려 공략을 준비해 641년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어 지리지세와 국경의 군사 사정 및 수비 현황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영류왕은 이처럼 당과의 전쟁을 대비해 가던 도중 재위 25년(642)째에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죽임을 당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보장봉노 보덕이암」조 “영류왕” 참조.
[A-00-357]건무(建武)
고구려 제27대 영류왕의 원래 이름. 건성(建成)이라고도 한다. 제26대 영양왕의 이모제(異母弟).
[A-00-358]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제27대 왕. 원래 이름은 덕만(德曼). 즉위한 뒤 선덕으로 고쳐서 불렀다. 아버지는 제26대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여성으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사례이다. 진평왕은 스스로 석가모니의 아버지라고 자처하면서 아들 얻기를 바랐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딸만 얻었는데 그 가운데 장녀이다. 즉위 이전 이미 결혼을 한 듯한데 상대가 본서 왕력편에서는 음(飮)갈문왕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음(飮)을 반(飯)의 잘못으로 보고 이를 삼촌인 백반(伯飯)갈문왕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선덕왕 지기삼사」조 “선덕여대왕” 참조. 링크: A기이33.강22(3-1).선덕왕-3.
[A-00-359]보장왕(寶藏王)
고구려 제28대 왕이자 마지막 왕. 이름은 장(藏) 또는 보장(寶藏). 재위 도중에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므로 시호는 따로 없다. 영류왕, 즉 건무왕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영류왕은 재위 25년(642) 되던 해에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하던 실력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몰래 제거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보장왕이 즉위하였으니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의 일족과 일파에 집중되어 그들이 좌지우지하였으므로 국왕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공세를 연개소문이 주도해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거꾸로 국력은 점차 소진되고 그들에 대한 권력의 집중 정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이후 대당 강경 일변도의 정책으로 660년 백제 멸망을 눈앞에서 보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등 국제 관계에 매우 어두운 면모를 보였다. 게다가 장기간에 걸친 일당의 독재 정권으로 내부 불만이 점차 쌓였다. 666년 연개소문 사망을 계기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였다. 이후 내분이 한층 격화되어 갔고 마침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의외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보장왕은 당으로 끌려갔는데, 677년 고구려 고토의 사정이 심상치 않자 당은 그를 요동주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보장왕은 요동에서 고구려 부흥을 도모해 말갈과 연합하려다가 발각되었다. 당은 보장왕을 본국으로 소환해 681년 공주(邛州)로 귀양을 보냈는데 그 이듬해에 사망해 낙양에 묻혔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보장봉노 보덕이암」조 “보장왕” 참조.
[A-00-360]의자왕(義慈王)
백제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 무왕의 맏아들. 무왕 재위 33년(632) 태자로 책립되어 641년 즉위하였다. 의자는 생전의 왕명이며 시호는 따로 없다. 어머니는 본서 기이편2 「무왕」조에 보이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인지, 아니면 미륵사서탑에서 출토된 539년의 「사리봉안기」에 등장하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인지 혹은 제3의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왕비는 660년의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백제 멸망 요인을 제공한 인물로 지적된 요부(妖婦)인지, 「일본서기」 권26 제명기(齊明紀)에 의자왕의 처로 등장하는 은고(恩古)인지, 아니면 제3의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당시 백제에는 복수의 왕비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의자왕 재위 2년(642) 궁정에서 국주모(國主母: 국왕의 어머니) 사망을 계기로 내분이 벌어져 의자왕 동생의 아들인 교기(翹岐)를 비롯한 여러 유력 인물들이 섬으로 추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또한 당시 의자왕의 주변을 둘러싸고 다수의 여성이 마구 얽혀 심히 불안정한 정국이었음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의자왕은 즉위 초기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가 대단히 깊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曾子)라고 부를 정도였다. 재위 초기에는 지배 질서의 안정을 발판으로 영역 확장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를수록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후계자 문제를 놓고 내부 갈등을 유발하였으며 국제 동향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상태에서 나당 연합군의 총공세를 견디지 못해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의자왕은 태자를 비롯한 유력자 88명, 주민 1만 2천 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얼마 뒤 낙양(洛陽)에서 병사하여 북망산에 묻혔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 “의자왕” 참조.
[A-00-361]덕만(德曼)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의 원래 이름. 석가족 신앙 아래 불교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이름을 선택한 듯하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선덕왕 지기삼사」조 “덕만” 참조.
[A-00-362]마야부인(麻耶夫人)
마야(摩耶)의 다른 표기. 진평왕의 첫 왕비이며 선덕여왕의 어머니. 본조 각주 “마야부인” 참조.
[A-00-363]성골남진(聖骨男盡)
성골의 남자가 다하여 선덕이 여자로서 즉위하였다는 의미.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최초로 즉위할 수 있는 명분으로서 내세워졌다.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말기에 이르러 후사 문제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당시 친족 가운데 혈연상으로 가장 가까운 인물은 진지왕의 아들로서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용춘(龍春)이었다. 그러나 용춘은 할아버지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실정(失政)으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탓에 정상적 과정을 밟아서는 즉위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외에 진흥왕의 직계로서 생존하여 즉위가 가능한 남성이 없었다. 그래서 진평왕은 자신의 딸을 즉위시키기로 중대 결단을 내렸다. 이때 그를 위한 명분으로서 내세워진 것이 이른바 ‘성골남진’론이었다. 여성의 즉위는 전례가 없었으므로 자연히 반발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대의 명분으로 내세워진 것이 여왕은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라는 논리였다. 아마도 후자는 631년(진평왕 53)에 선덕의 즉위 추진에 반대한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일으킨 모반에서 처음 내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뒷날 여성의 정치 간여를 무척 싫어한 당 태종의 입을 통해 다시 신라에 들어와, 선덕여왕이 임종하기 직전인 647년 1월 초 벌어진 상대등 비담(毗曇)이 여왕의 통치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명분으로 재활용되었다.
※골품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보주 〈골품제〉 참조.
[A-00-364]음(飮)갈문왕
선덕여왕의 남편. 이 밖에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음(飮)이 반(飯)과 매우 비슷한 글자여서 서사나 판각의 과정에서 잘못 쓰였을 수가 있다. 또 당시 갈문왕으로 책봉되는 대상이 지극히 한정된 상태였으므로 진평왕의 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가운데 어느 쪽일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양자 가운데 전자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선덕왕 즉위에 즈음해서는 백반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듯하다.
[A-00-365]인평(仁平)
선덕여왕 재위 3년(634)째에 사용하기 시작한 연호. 신라에서는 법흥왕 23년(536) 건원(建元)을 처음 사용한 이래 연호 사용이 계속 이어졌다. 다만 1세 1연호가 아니라 별다른 사유가 없으면 전대의 연호까지 그대로 이어서 사용함이 일종의 관행으로 정착되이었다. 선덕여왕도 즉위한 뒤 아버지 진평왕이 재위 6년(584)부터 사용한 건복(建福)을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인평으로 고쳤다. 하지만 본 왕력편에서는 건복을 사용한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이 “인평 임진년(632)에 즉위하였다.”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다. 이때에는 아직 인평이 사용되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A-00-366]15년간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을 16년이라 하여 1년의 차이가 난다. 아마도 선덕여왕의 사망 시점이 647년 정월이어서 이를 처리하는 기년 방식의 차이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A-00-367]진덕여왕(眞德女王)
신라 제28대 왕. 제27대 선덕여왕의 사촌 여동생으로서 제26대 진평왕의 아우인 국반갈문왕의 딸. 어머니는 아니(阿尼) 혹은 월명(月明)부인으로 성은 박씨. 선덕여왕과 마찬가지로 ‘성골남진’을 명분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즉위에 대해서도 역시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처럼 상대등 비담을 중심으로 하는 유력 귀족들의 강한 반발이 뒤따랐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진덕왕」조 “진덕여왕” 참조.
[A-00-368]승만(勝曼)
진덕여왕의 본래 이름.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승만경(勝鬘經)」과 연관해서 지어진 불교식 이름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의 본래 이름인 덕만과 마찬가지로 석가족 신앙 아래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름이 선택된 듯하다.
[A-00-369]국반(國飯)
진덕여왕의 아버지로서 제26대 진평왕의 둘째 아우. 국분(國芬)이라고도 한다. 진평왕이 즉위하던 해에 첫째 아우인 백반(伯飯)을 진정(眞正)갈문왕으로, 둘째 아우인 국반을 진안(眞安)갈문왕으로 책봉하였다.
[A-00-370]진안(眞安)갈문왕
원래의 이름은 국반(國飯) 혹은 국분(國芬). 진평왕은 즉위하던 해(579)에 첫째 아우인 백반을 진정갈문왕, 둘째 아우인 국반을 진안갈문왕으로 책봉하였다.
[A-00-371]아니부인(阿尼夫人)
진덕여왕의 어머니. 남편은 진안갈문왕. 성은 박씨. 아니는 비구니를 뜻하는 단어이므로 출가하였거나 혹은 불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데서 지어진 이름인 듯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월명(月明)부인이라 하였다. 왕력편에서는 이를 소개하면서도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A-00-372]노(奴)
진덕여왕 외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성은 박씨이다. 각간을 역임하였으며 진덕여왕에 의해 만천(滿天)갈문왕으로 추봉되었다. 이름을 단지 노라고만 되어 있으나 이는 서사나 판각 과정에서 잘못이 들어간 듯하다.
[A-00-373]만천(滿天)갈문왕
진덕여왕의 외할아버지인 노(奴)의 추봉호. 각간을 역임. 딸이 진덕여왕의 어머니인 아니 혹은 월명부인이다.
[A-00-374]월명(月明)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덕여왕의 어머니. 본 왕력편에서도 진덕여왕의 어머니를 박씨 아니(阿尼)부인이라 하고 월명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월명과 아니가 동일인이라면 박씨로서 만천갈문왕으로 추봉된 각간 노(奴)의 딸인 셈이다.
[A-00-375]태화(太和)
진덕여왕 대에 사용된 연호. 진덕여왕은 647년 1월 즉위하였는데 선덕여왕 대의 연호인 인평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7월에 이르러서 태화로 바꾸었다. 법흥왕이 건원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한 이후 국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새로운 연호를 내세운 사례로는 태화가 유일하다. 이는 신라에서 사용된 마지막 연호이기도 하다.
[A-00-376]중고(中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삼국유사」가 설정한 삼고법으로 구분했을 때 상고와 하고 사이에 낀 일정 기간을 가리키는 용어. 관련 사항은 본서 각주 권1 「왕력」 “중고” 참조.
[A-00-377]성골(聖骨)
8계층으로 완성되는 신라 골품제의 구조 가운데 제일 상층을 차지한 골족. 그 자체 신성한 골족(骨族)이라는 뜻이다. 성골의 실체나 성격, 성립 시점 등을 둘러싸고 오래도록 논란이 되어 왔다. 골품제는 고대사회의 독특한 신분제로서 신라 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라 사회를 살피는 주요 관건으로서 골품제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된 핵심은 주축이라 할 골족, 특히 성골과 진골의 구별 문제였다. 골이란 글자의 공유가 시사해주듯이 양자는 같은 데에 뿌리를 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구별의 배경이나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 크게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불교의 영향과 함께 가계 분화가 관심사로 떠올라 6세기 이후 불교식 왕명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특히 그 가운데 진평왕 대가 주로 주목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그 시점에 지배 체제가 정비되고, 고양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왕실 위상이 부상하는 등등의 일들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해 진평왕 중심의 직계 존비속(尊卑屬)을 드높이려는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골족 가운데 자신들을 각별히 신성가족이라 여김으로써 성골 관념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정황을 입증해 주는 것이 국왕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상장하는 진평왕 대에 마련된 천사옥대(天使玉帶)이다. 천사옥대는 국왕의 위상이 하늘로부터 주어졌음을 나타내는 존재로서 신라의 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국왕이 즉위 의례나 조상 숭배 제사, 종묘 참배 등 국가의 각종 주요 행사에서 천사옥대를 착용함으로써 성골로서의 위상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골품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보주 〈골품제〉 참조.
[A-00-378]하고(下古)
본서 왕력편에 보이는 신라 천년사의 시기 구분법인 삼고법(三古法) 가운데 맨 뒤에 해당하는 시기. 제29대 태종무열왕부터 제56대 경순왕까지를 말한다. 신라 56왕을 둘로 나누면 뒤쪽 28왕의 출발이 하필이면 태종무열왕이어서 초기 왕계가 이를 기준으로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자체의 편목이 꼭 이를 기준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치사를 중심으로 기이편을 둘로 나누면서 이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가르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삼국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에게 비중을 크게 둔 구분법으로서 「삼국사기」의 인식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삼국사기」는 하고에 해당하는 전 기간을 다시 중대(中代)와 하대(下代)로 양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각 사서마다 나름의 입장과 기준을 갖고 신라 천년의 역사를 시기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가 상고와 하고의 사이에 중고를 설정한 것은 아마도 이 시기가 불교식의 왕명 시대인 점을 고려하면 당시 초기 불교의 수용과 정착을 각별히 인식한 사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고에는 중고와 다르게 사후 유교식의 시호제(諡號制)와 묘호제(廟號制)를 실시하였다. 다만 태종 무열왕 이후에는 묘호를 따로 두지 않고 시호를 활용하였다.
[A-00-379]진골(眞骨)
8등급으로 이루어진 신라 골품제의 구조 가운데 제2등급. 골품제는 세분하면 크게 8계층으로 구성되었으나 사실상 골(骨)과 두(頭)의 두 집단으로 정리된다. 원래 이들 두 집단이 별개로 존재하면서 각각 분화의 과정을 밟아 8계층으로 나뉘었다고 봄이 적절하다. 골은 성골과 진골의 양자로, 두는 6두품 이하 1두품에 이르기까지 6등급으로서 전체 8계층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골품제는 크게 골품과 두품의 둘로 구분된다. 골과 두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논란이 되어 왔다. 두는 겉으로 드러난 머리 자체를 가리키지만 골은 머리 안에 들어가 있는 골수(骨髓)로서 두와는 달리 헤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양자는 출발점에서부터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골품제의 운영상에서 주요 핵심은 골품과 두품 사이의 경계선에 놓일 수밖에 없다.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어 두품으로부터 골품으로의 신분 상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같은 골족에서 성골이 상승 분화한 것과는 거꾸로다. 성골은 신성가족으로서 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극심한 내부 근친혼을 강행함으로써 범위가 점차 좁아져 결국 소멸하고 말았다. 따라서 골품제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진골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국왕이 현실의 정치적 기반을 발판으로 다른 친족 집단과 구별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진행되어 새로운 신분층이 출현하고 있었다. 그것이 곧 신라사의 전개 과정이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 법민」조 “진골” 참조.
※보주 <골품제> 참조
[A-00-380]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 왕. 즉위하기 이전의 원래 이름은 김춘추. 아버지는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며, 어머니는 제26대 진평왕의 딸인 천명(天明)부인. 왕비는 문명(文明)부인으로 금관국계 김서현(金舒玄)의 딸이며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이다. 태종은 묘호이며, 무열왕은 시호이다. 사후에 마치 신도비적 성격으로서 세워진 「태종무열왕릉비」의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제액이 이를 증명해 준다. 신라에서 묘호와 시호를 동시에 보유한 유일한 사례이다. 뒷날 신문왕 대에 신라와 당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을 때 태종이라는 묘호의 사용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 신라는 따로 조종지법에 따른 묘호 사용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문무왕 이후에는 시호가 묘호를 겸하였다. 다만, 신라는 중국식의 종묘제가 정식 도입되기 이전에도 태조(太祖)를 사용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때의 태조란 정상적인 종묘법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단순하게 시조묘(始祖廟)에 올리기 위한 용도였던 듯한데, 568년의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처음 보인다. 하지만 3성 교립 및 김씨 족단의 시조 등과 연동해 태조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신문왕 대에 세워진 「문무왕릉비」를 비롯한 몇몇 금석문에서는 태조가 성한(星漢)임을 적시하고 있다. 성한은 기존 문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이름이다. 그래서 성한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아 확정적이지 않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태종대왕” 참조.
[A-00-381]춘추(春秋)
신라 제29대 무열왕의 이름. 중고기 인명에는 세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신라식의 이름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이름, 불교식 법명, 한자의 음과 훈을 함께 의식한 유학식 이름이다. 대체적으로 신라식 이름이 일반화된 상태에서 6세기에 불교식 법명이 수용되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유학식 이름이 생겨나 점차 커져 가는 추세였다. 이름이 곧 불리는 사람의 지향과 희구를 담는 것이라면 그처럼 변화해 간 속에는 곧 사회사상의 양상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춘추는 유학식 이름이 분명하며, 특히 성현 공자가 정리한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를 의식해 지어졌을 공산이 크다. 6세기 후반부터 주공(周公)이나 후직(后稷)처럼 중국 문화의 유학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활용하는 경향성을 고려하면 그처럼 추리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한 측면에서 김춘추의 영원한 동지인 김유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불교식 왕명 시대에서 유학식 시호 시대로 바뀌어 가는 커다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 주고 있다. 관련 내용은 본조 각주 “태종 무열왕”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태종대왕” 참조.
[A-00-382]용춘(龍春)
신라 제29대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일명 용수(龍樹). 아버지는 제25대 진지왕이며, 어머니는 뚜렷하지 않다. 진지왕이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知刀)부인과 혼인하였으나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본서 기이편 「도화녀비형랑(桃花女鼻荊郞)」조에서는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폐위된 요인을 정치가 어지럽고 진지왕이 황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사례로서 유부녀인 도화녀와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다. 진지왕이 사망한 뒤 그의 영혼이 도화녀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비형랑이다. 이런 상징을 받아들이면 비형랑은 진지왕의 사생아이자 유복자인 셈이다. 진평왕이 즉위한 뒤 비형은 궁중에서 길러져 국사를 도왔다고 한다. 비형의 실체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지만 이를 용춘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진평왕은 뒷날 용춘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다. 진평왕은 왕실 조직의 강화를 도모해 실무를 총괄하는 관부로서 내성(內省)을 두고 총책임자인 사신(私臣)의 자리에 용춘을 앉혔다. 용춘은 629년(진평왕 51) 대장군으로서 사돈인 김서현 및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가 점거한 낭비성(娘臂城)의 탈환 작전에 출정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용수” 참조.
[A-00-383]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이 대왕으로 추봉되었을 때의 시호. 무열왕은 654년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문흥대왕으로, 어머니를 문정태후로 추봉하였다. 왕력편에서는 용춘을 문흥갈문왕이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근거로 하면 용춘이 대왕으로 추봉되기에 앞서 이미 갈문왕으로 먼저 책봉된 셈이 된다.그러나 용춘은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당시 갈문왕은 국왕의 친동생을 대상으로 책봉하는 경향이었으므로 이는 대왕과 혼동한 것으로 봄이 온당하다. 다만 신라 하대 초기 충공(忠恭)의 경우 대왕으로 추봉되었음에도 갈문왕이라고 일컬은 사실로 미루어 양자가 혼용되었을 여지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굳이 용춘을 추봉하면서 대왕이라고 내세운 것은 5묘제를 도입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갈문왕으로서는 정식으로 종묘에 입묘(入廟)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왕이 정리한 5묘 속에 문흥대왕이 입묘되어 있음은 그를 증명한다. 용춘의 무덤을 5묘제와 연관 지어 서악고분군의 왕릉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용수” 참조. 링크
[A-00-384]용수(龍樹)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의 일명. 원래 용수였는데 용춘으로 바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용수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유명한 인도 승려인 용수의 이름에서 따온 반면 용춘은 유학식 이름이다. 따라서 이름의 변경에는 어떤 사상적 기반의 변동이 깔려 있을 여지가 엿보인다. 본편 주383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용수” 참조.
[A-00-385]천명부인(天明夫人)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 제26대 진평왕의 딸로서 김용춘과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 김춘추가 즉위하던 654년 바로 그해에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추봉할 때 어머니도 함께 문정태후로 추봉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천명부인” 참조
[A-00-386]문진태후(文眞太后)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 원래의 이름은 천명이고 문진은 654년 추봉하였을 때의 책봉호이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봉호가 문정(文貞)으로 나오는데 문진의 진(眞)은 정(貞)의 잘못인 듯하다.
[A-00-387]훈제(訓帝)부인
무열왕의 왕비 이름.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원래는 문희(文姬)였으나 왕비로 책봉된 후 봉호를 훈제부인이라 한 것 같다. 시호는 문명이다.
[A-00-388]문명왕후(文明王后)
원래 이름은 문희로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태종 무열왕의 왕비. 왕비로 책봉된 뒤 훈제부인이라 하였으나 사후 문명으로 시호하였다. 김유신의 부인 지조(智照)는 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 밖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여러 명 있었다.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태종춘추공」조 “문명황후” 참조.
[A-00-389]유신(庾信)
595~673. 신라 통일기의 명장인 김유신. 아버지는 금관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 김서현이며,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이다. 무열왕의 왕비 문명왕후가 그의 여동생이므로 두 사람은 처남과 매부지간이다. 김유신은 무열왕과 함께 백제를 병합하고 그 뒤 문무왕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김유신」조 “유신” 참조.
[A-00-390]문희(文熙)
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의 원래 이름. 문희(文姬)라고도 표기. 어린아이 때의 이름은 아지(阿之).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이다. 김유신은 영원한 동지인 김춘추 일가와의 정치적 우호 관계를 굳건히 다지기 위한 원대한 책략 아래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와 혼인시켰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태종춘추공」조 “문희” 참조.
[A-00-391]문무왕(文武王)
신라 제30대 왕.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장남.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인 훈제부인인데 시호는 문명왕후. 즉위하기 이전의 이름은 법민(法敏). 왕비는 자의(慈義, 慈儀)부인으로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다. 무열왕이 재위 2년(655)에 여러 아들들에게 관등을 부여하면서 법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661년 무열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신라에서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에 오른 첫 사례이다. 이후 신라에서 태자가 책봉되어 즉위하는 관행이 뿌리내려졌다. 신라가 삼국 통합을 일구어내는 데에 최후, 최고의 주역이었다. 죽음에 직면하여 사후 장례를 간소화해 화장하여 동해에 뿌리도록 하였는데 바로 감포의 대왕암이다. 외세인 당을 물리치려는 염원으로 세운 사천왕사 앞에 세웠던 능비가 3개의 비편으로 그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 법민」조 “문무왕” 참조.
[A-00-392]태종(太宗)
제29대 무열왕 김춘추의 묘호. 묘호로서는 이보다 앞서 사용된 태조(太祖)가 있으나 이는 단순히 시조를 가리킬 뿐 종묘제의 묘호는 아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열왕 대에 유교식의 5묘제가 처음 수용된 뒤 사용된 묘호이다. 다만 이후 신라에서는 따로 묘호를 내세우지 않고 시호를 묘호로 사용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시호” 참조.
[A-00-393]자의(慈義)
문무왕의 왕비. 자눌(慈訥)왕후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파진찬 선품이다.
[A-00-394]눌(訥)
문무왕의 왕비 자의의 일명이지만 의(儀, 義)를 눌(訥)의 뜻으로 풀이하여 정식으로는 자눌이라고 함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A-00-395]선품(善品)
문무왕의 왕비인 자의왕후의 아버지. 파진찬 관등을 역임하였다. 본서 기이 편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진흥왕의 손자라고도 하였다. 이는 견훤의 가계를 드높이기 위한 것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여타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A-00-396]해간(海干)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등에 해당하는 파진찬(波珍湌)의 다른 표기.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한다. 파진찬, 파미간이 바다를 가리키는 단어의 음차라면 해찬은 훈차인 셈이다. 해간은 금석문상에서는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지만 파진찬은 539년의 「울산천전리서석」 추명에 피진간지(彼珎干支)로 처음 등장한다. 이 관등은 원래 바다와 밀접하게 연관된 수장에게 부여한 데서 비롯된 듯한데 관등의 유래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로서 주목된다.
[A-00-397]무덤
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뒤 수장한 무덤인 대왕암(大王岩). 문무왕은 사망하면서 서국식(西國式)으로 화장해서 동해안에 묻도록 유언하였다. 이는 외적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는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강력한 호국 의지의 표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유언에 따라 동해안의 대종천(大鍾川) 입구에 위치한 바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는 지금껏 대왕암 또는 대왕석이라 불린다. 다만 화장한 뼈를 수장하면서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하는 등의 방식을 두고 논란이 많다. 여하튼 화장과 수장 자체는 물론이고 무덤을 경주 분지로부터 가장 먼 곳에다 조성한 사실은 엄청난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무왕이 통일 이후의 수성(守成)에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뚜렷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만파식적」조 “대왕암” 참조.
[A-00-398]감은사(感恩寺)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소재한 절의 이름. 원래 문무왕이 통일 이후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외적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한 염원에서 창건을 시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하자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 완공해 사명을 감은사로 지었다. 문무왕의 강한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뒷날 만파식적 설화의 동인이 되었다. 문무왕이 사망하자 감은사에서 바로 보이는 동해 바다에 있는 대왕암에 뼈를 묻어 이와 하나의 세트로서 운용하였다. 그래서 금당의 아래에 구멍을 뚫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문무왕의 화신인 용이 드나들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런 구조는 발굴한 결과와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통일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사찰을 성전사원(成典寺院)이라 하였거니와 감은사는 그 셋째에 열거되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만파식적」조 “감은사” 참조.
[A-00-399]신문왕(神文王)
신라 제31대 왕. 제30대 문무왕의 첫째 아들. 어머니는 자의(慈儀)왕후. 첫째 왕비는 김흠돌(金欽突)의 딸인데 아버지가 기도한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출궁 당하였다. 둘째 부인은 태종 무열왕의 사위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神穆)부인. 문무왕 5년(665)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681년 즉위하였다. 즉위 이전의 이름은 정명(政明) 또는 명지(明之)라 하였다. 아버지인 문무왕의 통일 정책과 지향을 이어받아 지배 질서 전반을 새롭게 재정비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만파식적」조 “신문대왕” 참조.
[A-00-400]정명(政明)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이름. 명지(明之)라고도 하였다.
[A-00-401]일소(日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사용한 자(字). 자란 성년이 되면서 관례(冠禮)를 올리고 새로 지은 이름이다. 신라에서 간혹 자를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지만 일반적인 경향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A-00-402]신목(神穆)왕후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두 번째 왕비. 신목(神睦)으로도 표기.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사위인 김흠운의 딸. 신문왕은 즉위하기에 앞서 태자였던 시절에 김흠돌의 딸과 혼인하였다. 신문왕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이 난을 일으켜 진압 당한 데에 연루되어 출궁 당하였다. 신문왕은 즉위 초에 빚어진 정치적 혼란상을 어느 정도 수습한 뒤인 재위 3년(683) 김흠운의 딸을 새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이때 혼례가 행해진 과정 전반과 내용이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혼인 후 4년 만인 신문왕 7년(687) 원자 이홍(理洪)이 태어났다. 신문왕이 재위 12년째 되던 692년 사망하고 태자 이홍이 겨우 6세의 나이로 즉위하자(효소왕) 어머니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그러다가 효소왕 9년(700) 사망하였다. 706년 작성된 「(전)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의하면 신목왕후가 효소왕과 함께 신문왕을 기리기 위하여 3층의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효소왕도 이로부터 2년 뒤인 702년 사망하자 뒤를 이은 성덕왕(聖德王)이 재위 5년(706) 이들 2인과 신문왕을 추복하기 위하여 사리 장치를 안치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다.
[A-00-403]김운공(金運公)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재혼한 둘째 왕비 신목왕후의 아버지.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신문왕 3년조(683)에는 신목왕후의 아버지를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이라 하였다. 김운공은 김흠운을 그렇게 부른 것인지 아니면 누락에 의한 잘못인지 분명하지 않다. 공은 흔히 고위 귀족 남자의 이름 뒤에 붙여서 부른 호칭이므로 이름을 김운으로 고친 것인지도 잘 알 수 없다. 김흠운은 「삼국사기」 권47 열전(7) 김흠운(金歆運)전에는 신라 제17대 나물왕의 8대손으로서 잡찬 달복(達福)의 아들이며,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사위로서 655년 낭당대감(郎幢大監)이 되어 백제와의 전투에 출정하였다가 조천성(助川城) 싸움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무열왕의 딸로 김흠운의 부인이 된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A-00-404]무후(武后)
측천무후를 줄여서 나타낸 표현. 당나라 제3대 황제인 고종의 황후. 원래는 그의 아버지 제2대 태종의 궁녀였다. 태종이 사망한 뒤 사원에서 비구니로 살던 그녀는 고종이 즉위하면서 황궁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온갖 계략과 정치적 술수를 동원해 마침내 황후가 되었다. 683년 고종이 사망한 뒤 측천무후는 첫아들 예종을 황제로 즉위시켰다가 몇 달 지나지 않은 이듬해 2월 폐위시키고 대신 둘째 아들 중종을 즉위시켰다. 측천무후는 690년에는 중종까지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도 주(周)로 바꾸었다. 따라서 측천무후가 제위에 오를 때까지는 사실상 예종과 중종의 재위 기간이었으므로 여기처럼 이들을 제외하고 무후를 표제로 앞세운 것은 잘못이다.
[A-00-405]천수(天授)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처음 사용한 연호. 주의 건국과 함께 자신의 즉위를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의미로 정당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깃든 연호이다. 천수의 바로 앞에 초재(初載)란 연호가 8월까지 잠시 사용되었으나 여기에는 누락되어 있다. 원래 연호에는 대체로 정치적 지향과 같은 의미가 담기게 마련이다. 특히 측천무후는 지나칠 정도로 문자에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독자적 문자를 새로이 만들어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연호를 무척 자주 바꾼 것도 그런 의식의 발로였다. 측천무후가 왕후로 있던 고종 재위 연간에도 비슷한 면모를 보였다.
[A-00-406]효소왕(孝昭王)
신라 제32대 왕. 제31대 신문왕의 아들. 효조(孝照)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신목왕후.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 신문왕 11년(691)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이듬해 즉위하였다. 신문왕 7년(687)에 태어났으므로 즉위할 때의 나이는 겨우 6세였다. 다만, 본서 탑상편 「오대산오만진신(五臺山五萬眞身)」조에는 16세라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어려서 즉위한 탓에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706년에 작성된 「(전)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의하면 신목왕후가 사망한 2년 뒤인 702년 7월 27일 효소왕도 사망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도 그대로 일치한다. 효소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가 17세에 사망한 탓인지 혼인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소왕대 죽지랑」조 “효소왕” 참조.
[A-00-407]망덕사(望德寺)
신라 제31대 신문왕 5년(685) 창건이 완료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 「삼국유사」 권5 감통편 「진신수공」조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짓기 시작하여 6년(697)에 완공하였다는 또 다른 기록도 보인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창건의 시작 시점은 문무왕 후반으로서 신라가 한창 당과 전쟁할 때였다. 당시 당나라의 공격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승려 명랑(明朗)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사용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첩보를 입수한 당이 신라에 시비를 걸어 진위 확인 차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신라는 그에 대처해 부랴부랴 임시 사찰을 지어 이를 사천왕사라고 속이면서 당 황제의 축수(祝壽)를 빌기 위해서라 둘러대고 사신을 뇌물로 회유하였다. 당의 사신이 귀국해 신라의 요구대로 보고함으로써 두 나라에 빚어진 갈등은 일단 해소되었다. 이에 절의 이름을 망덕사로 지었다 한다. 통일 이후 왕경 전반을 정비하면서 망덕사는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망덕사에는 목제로 된 13층의 동서 두 탑이 매우 상징적이었다. 당에서 변란이 벌어질 때마다 두 목탑이 흔들려 부딪히기도 하면서 동향을 알렸다고 한다. 현재 낭산 자락의 사천왕사로부터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배반동 들판에 그 터가 남아 있다. 1969년에서 1970년에 걸쳐 행해진 발굴로 금당과 강당, 중문 및 회랑과 함께 동서 쌍탑의 목탑 터를 확인하였다. 현재 현장에는 보물 제69호로 지정된 당간지주만이 사찰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을 따름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 법민」조 “망덕사” 참조.
[A-00-408]무덤은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있다.
망덕사를 기준으로 효소왕릉의 위치를 알려 주는 독특한 표현.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효소왕릉은 망덕사의 동편 가까운 어느 지점에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 효소왕릉은 경주시 조양동에 위치한 성덕왕릉과 가까운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조선 영조 6년(1730) 신라 왕릉을 대충 비정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서 현재 크게 논란되고 있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망덕사를 기준으로 삼은 이 기록대로라면 (전)신문왕릉이 실상에 가장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서 이곳을 효소왕릉이라 비정하고 대신 신문왕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낭산 동쪽이란 기록을 받아들여 (전)황복사지 동편의 파괴된 무덤이거나 아니면 (전)진평왕릉으로 추정하려는 견해도 있다. 전자는 최근 발굴을 통해 원래부터 무덤이 조영되지 않은 상태로 밝혀졌다. 방향만을 중시한다면 (전)효공왕릉으로 비정된 무덤이 효소왕릉일 여지도 엿보인다.
[A-00-409]성덕왕(聖德王)
신라 제33대 왕. 제31대 신문왕의 아들. 이름은 흥광(興光) 또는 융기(隆基). 당나라가 현종(玄宗)의 이름인 융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이후 흥광을 사용한 듯하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에는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어머니가 신목왕후이며, 효소왕의 동생이라 하였다. 다만, 효소왕이 탄생한 687년 이전에 이미 신문왕에게 태자가 존재한 사실이 보이므로 문제가 된다. 혼인 시점으로 보아 이 태자가 신목욍후의 소생으로서 뒷날 즉위하는 효소왕일 리 만무하다. 이 태자는 신문왕의 원래 왕비인 김흠돌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지 모른다. 성덕왕의 즉위와 혈통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내재해 있는 셈이다. 본서 탑상편 「오대산오만진신(五臺山五萬眞身)」조에는 성덕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가 22세였다는 기사가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성덕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태자를 거치지 않고 국인에 의해 추대된 사실, 이 밖에 그의 즉위와 관련한 특이한 기록이 보여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점도 성덕왕의 어머니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점이다. 성덕왕은 즉위 3년(704)째에 승부령(乘府令)인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 사람이 첫째 왕비인 성정(成貞) 또는 엄정(嚴貞)왕후이다. 성덕왕은 12년 뒤인 716년 이혼하고 4년 뒤인 720년에는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으니 바로 소덕(炤德)왕후이다 .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성덕왕」조 “성덕왕” 참조.
[A-00-410]융기(隆基)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원래 이름. 706년 작성된 「(전)황복사사리함기」에 융기대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712년 즉위한 당나라 현종의 이름도 융기였으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래서 이후 새로이 사용하게 된 이름이 흥광으로 보인다. 「당서」에 융기는 보이지 않고 흥광만 나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성덕왕」조 “성덕왕” 참조.
[A-00-411]모제(母弟)
한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라는 의미. 다만, 여러모로 성덕왕이 실제 효소왕의 모제인지 어떤지는 명확하지 않다.
[A-00-412]배소(陪昭)왕후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첫째 왕비. 사후 엄정 또는 성정(成貞)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승부령을 역임한 소판 김원태의 딸이며 성덕왕 재위 3년(704)에 혼인하였다. 그러다가 12년 만인 성덕왕 재위 15년(716) 갑작스럽게 출궁 당하였다. 바로 직전 해에 그녀 소생인 왕자 중경(重慶)이 태자로 책립된 사실을 고려하면 출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심쩍은 부분이 엿보인다. 바로 이듬해인 717년 태자가 사망한 사실도 석연치가 않다.
[A-00-413]원대(元大)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첫째 왕비인 배소왕후의 아버지. 「삼국사기」에는 소판 김원태로 되어 있다. 승부령을 역임한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A-00-414]점물(占勿)왕후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둘째 왕비로서 시호는 소덕(炤德). 각간 김순원의 딸로서 성덕왕 19년(720) 혼인하였으나 4년 만인 724년 12월 돌연 사망하였다. 태자인 승경(承慶, 효성왕)과 헌영(憲英, 경덕왕) 두 아들을 낳았다.
[A-00-415]순원(順元)
김씨로 성덕왕의 둘째 왕비인 소덕왕후의 아버지. 제32대 효소왕 7년(698) 대아찬으로서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에 보임되었다. 효소왕 9년(700) 이찬 경영(慶永 혹은 경현(慶玄))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참형을 당하였을 때 김순원도 연좌(緣坐)되어 시중에서 면직되었다. 김순원이 경영의 모반 사건에 어떻게 연루된 것인지, 경영과의 혈연관계가 어떠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문왕과 신목태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706년 (전)황복사탑 2층 탑신 윗부분의 사리공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금제 불상과 사리 등이 들어간 사리함을 장치하는 등의 불사를 거행할 때 주도자로서 김순원이 등장한다. 이로 보면 김순원은 그들과 가까운 혈연관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과 재혼한 소덕왕후가 그의 딸인 사실도 그런 측면을 유추하게 한다
[A-00-416]동촌(東村)
경주 시가지 중심부로부터 막연하게 동쪽에 있는 몇몇 마을을 아울러서 가리키는 표현. 본서 기이편 「신라시조혁거세」조에 의하면 고려 초기의 동촌에는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등이 속한 곳과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乃兒) 등이 속한 곳 등 두 동촌이 보인다. 전자는 6부 가운데 급량부였던 곳을 고려 초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고, 후자는 한기부를 가덕부(加德部)로 고친 곳에 소속하였다고 한다.
[A-00-417]양장곡(楊長谷)
성덕왕릉이 자리 잡은 곳 주변 골짜기의 이름. 경주시 조양동 동쪽의 계곡 일원을 가리키는 듯하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에 의하면 성덕왕은 이거사(移居寺)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므로 이 부근 일대일 듯하다. 본서 왕력편에 의하면 성덕왕의 둘째 아들인 경덕왕도 원래는 모지사(毛祗寺) 또는 경지사(頃只寺)의 서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가 뒷날 양장곡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덕왕릉은 경주부의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고 한다. 현재 성덕왕릉으로 지정된 곳은 경주시 조양동 산8번지이다. 거기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 십이지신상과 사자상 등 석물로 장식된 무덤이 존재한다. 성덕왕이 사망하고 18년이 지난 뒤인 경덕왕 13년(754)에 세워진 능비의 귀부가 현장에 남아 전한다. 성덕왕릉은 신라 왕릉 가운데 위치가 확실시되는 몇 안 되는 능의 하나로 손꼽힌다.
[A-00-418]효성왕(孝成王)
신라 제34대 왕. 제33대 성덕왕의 둘째 아들. 이름은 승경(承慶). 어머니는 소덕왕후. 성덕왕 23년(724) 겨우 4세 정도의 나이에 태자로 책립되었다. 앞서 배다른 형인 중경이 성덕왕 14년(715)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2년 만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승경이 737년 아버지 성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왕비는 김씨 혜명부인. 처음 박씨와 혼인한 적이 있으므로 재혼인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성왕」조 “효성왕” 참조.
[A-00-419]혜명(惠明)왕후
신라 제34대 효성왕의 왕비. 효성왕은 재위 2년(738) 당으로부터 왕비로 책봉된 박씨가 있었으니 그 이전에 이미 혼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3년(739)조에는 이찬 순원의 딸인 혜명과 혼인한 기사가 보인다. 그렇다면 혜명은 효성왕의 두 번째 왕비가 되는 셈이다. 본 왕력편에서 말하는 진종(眞宗) 각간의 딸이 박씨일 가능성이 크다.
[A-00-420]진종(眞宗)
본 왕력편에서는 각간으로서 효성왕의 왕비인 혜명왕후의 아버지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혜명이 효성왕의 둘째 부인으로서 김순원의 딸이라고 하여 차이가 난다. 진종은 혜명에 앞서 효성왕의 왕비였던 박씨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크다.
[A-00-421]법류사(法流寺)
신라 제34대 효성왕의 주검을 화장한 곳으로 등장하는 사찰.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6년조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법류사의 현재 위치는 잘 알 수가 없다. 본서 권5 신주편 「밀본최사」조에 통일 전쟁에서 활약한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어렸을 때 몸이 아파 그의 아버지가 귀신을 물리치는 독경을 위해 초빙한 승려가 법류사 소속으로 나온다. 이로 미루어 법류사는 늦잡아도 선덕여왕 대부터 존재한 사찰임이 확실하다. 35금입택 가운데 하나인 한기택(漢岐宅)이 법류사의 남쪽에 있었다는 기록 등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왕경 안의 한기부 지역에 속하였을 듯한 보문동 일대에 위치하였을 공산이 크다.
[A-00-422]경덕왕(景德王)
신라 제35대 왕. 이름은 헌영(憲英). 제33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 제34대 효성왕의 동모제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고 하나 처음부터 석연치 않은 면모가 엿보인다. 성년에 채 이르지 않은 나이로 즉위한 효성왕이 재위 3년(739) 3월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았거니와 같은 해 5월 자신의 동생인 헌영을 태자로 책봉한 사실은 그를 암시해 준다. 헌영의 태자 책립 밑바탕에는 어떤 미묘한 정치적 사정이 들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 “경덕왕” 참조.
[A-00-423]삼모부인(三毛夫人)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 아버지는 이찬 김순정(金順貞). 경덕왕이 재위 2년째 되던 743년 4월 서불한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하므로 삼모부인과는 바로 직전 이혼한 듯하다. 이혼의 사유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아직 20대 초반의 나이로서 결혼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았음에도 아들이 없음을 빌미로 내세워 폐위시켰다고 함은 석연치가 않다. 삼모는 폐위되어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해졌다. 삼모부인은 효정(孝貞) 이찬과 함께 경덕왕 12년(753) 엄청난 규모의 황룡사 대종을 만든 시주자로서 등장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3 탑상 제3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조 “삼모부인” 참조.
[A-00-424]만월부인(滿月夫人)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두 번째 왕비. 제36대 혜공왕의 어머니. 시호는 경수(景垂) 또는 경목(景穆). 서불한 김의충의 딸이다. 경덕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전비인 삼모부인을 출궁시킨 뒤 재위 2년(743) 새로 맞아들인 왕비가 만월부인이다. 아들인 혜공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혜공왕 4년(768)에는 당으로부터 대비(大妃)로 책봉되었다. 만월부인도 오래도록 딸만 여럿 두었을 뿐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마침내 혼인 16년 만인 758년 아들 건운(乾運), 즉 혜공왕을 얻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 “만월부인” 참조.
[A-00-425]의충(依忠)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두 번째 왕비인 만월부인의 아버지. 김씨. 「삼국사기」에는 서불한 김의충(金義忠)으로 나온다. 성덕왕 34년(735) 정월 당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올 때에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 영토로 인정하는 당 황제의 칙령을 받아 왔다. 바로 2년 전 발해가 산동성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을 때 신라가 당을 도와 발해의 남쪽 변경을 공격한 데 대한 반대급부였다. 이로써 오래도록 이어져 온 당과의 준전시(準戰時) 상태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 “의충” 참조.
[A-00-426]경지사(頃只寺)
경덕왕릉이 조영된 인근에 위치한 절. 「삼국사기」에는 경덕왕의 장지 부근에 모지사(毛祗寺)가 있다고 하였는데 양자는 동일한 사찰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소재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본서 기이편 「김유신」조에는 김유신의 무덤이 모지사(毛只寺)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달리는 봉우리에 있다고 하였다. 만약 양자가 같은 곳이라면 원래의 경덕왕릉과 김유신의 무덤은 가까운 곳에 자리한 셈이 된다. 그래서 현재 김유신의 무덤으로 비정된 곳을 오히려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대신 김유신의 무덤은 서악 고분군 가운데 가장 아래의 귀부가 있는 무덤으로 보았다.
[A-00-427]양장곡(楊長谷)으로 옮겨서 묻었다.
경덕왕의 원래 무덤은 경지사 혹은 모지사의 서쪽 봉우리에 위치하였다. 돌을 다루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함은 곧 거기에 여러 석물을 배치하였음을 뜻한다. 이를 근거로 경덕왕릉을 조선 후기 영조 때부터 지금껏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에 있는 무덤으로 비정해 왔으며, 현재 사적 제23호로 지정한 상태이다. 경덕왕릉을 양장곡으로 옮겨 묻었다는 것은 이 기록뿐이어서 실제로 그러하였던 것인지 확정 짓기 곤란한 실정이다. 다만, 양장곡은 바로 성덕왕릉이 조영된 골짜기이므로 성덕대왕신종의 조영이나 성덕왕릉 입비(立碑) 등 아버지에 대한 경덕왕의 지극한 효심을 고려하면 거기로 이장하였을 여지는 충분히 상정 가능하다. 현재 성덕왕릉 주변 일대에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석물 장식도 없는, 효소왕릉으로 비정된 비교적 초라한 무덤만 있다.
[A-00-428]보응(寶應)
당나라 숙종 연간에 1년 동안만 사용된 연호.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된 목간에서 이 연호가 보여 주목된다. 당시 당나라와 관련된 정보가 재빠르게 수용되던 양상을 반영한다.
[A-00-429]혜공왕(惠恭王)
신라 제36대 왕. 제35대 경덕왕의 외동아들. 이름은 건운(乾運). 어머니는 만월부인. 경덕왕 17년(758)에 태어났다. 오래도록 왕위를 이어 갈 아들을 희구한 경덕왕이 만월부인과 재혼한 지 15년 만에 힘들게 얻은 아들이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까닭에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혜공왕」조 “혜공왕” 참조.
[A-00-430]건운(乾運)
신라 제36대 혜공왕의 이름. 딸만 여럿 낳았던 경덕왕이 오래도록 아들 얻기를 희구한 끝에 힘겹게 아들을 얻게 되자 이름을 이처럼 지었다. 건운은 ‘하늘의 운’이란 뜻이므로 경덕왕이 이름을 이처럼 지어 무척 힘들게 얻은 아들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한 듯하다.
[A-00-431]신파(神巴)부인
신라 제36대 혜공왕의 첫 번째 왕비. 각간 위정(魏正)의 딸.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에서는 원비(元妃)가 신보(新寶)로서 이찬 유성(維誠)의 딸이라 하였다. 유성과 위정은 발음이 비슷하므로 동일 인물로 보아도 될 듯하다.
[A-00-432]위정(魏正)
신라 제36대 혜공왕의 원비인 신파(신보)부인의 아버지. 「삼국사기」에는 유성으로 되어 있다. 유성은 경덕왕 3년(744) 정월 중시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5월 물러났다.
[A-00-433]창창(昌昌)부인
신라 제36대 혜공왕의 두 번째 왕비. 각간 김장(金將 또는 金璋)의 딸. 김양상과 김경신이 주도해 김지정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던 와중에 혜공왕과 함께 시해된 것 같다.
[A-00-434]김장(金將)
신라 제36대 혜공왕의 두 번째 왕비인 창창부인의 아버지. 「삼국사기」에서는 김장(金璋)으로 표기되어 있다.
[A-00-435]선덕왕(宣德王)
신라 제37대 왕. 이름은 김양상(金良相). 780년 이찬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혜공왕이 시해된 뒤 즉위하였다. 할아버지는 각간 원훈(元訓), 아버지는 개성(開聖)대왕으로 추봉된 효방(孝芳)이며, 제17대 나물왕의 10세손이다. 어머니는 제33대 성덕왕의 딸인 사소(四炤)부인. 성덕왕의 외손자였으므로 혜공왕과는 내외종 간인 셈이다. 왕비는 각간 양품(良品)의 딸로 구족(具足)부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왕을 중대(中代)와 구분해서 하대(下代)의 문을 연 인물로 설정하고 있으나 아들이 없이 사망한 까닭에 왕위를 승계시키지 못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조서에 의하면 원래 왕위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았음을 표명하여 혜공왕 시혜 사건에 피동적으로 가담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사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안에 뼈를 뿌리도록 유언한 데에서도 그런 사정의 일단이 얼핏 간취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선덕왕” 참조
[A-00-436]양상(亮相)
신라 제37대 선덕왕의 이름. 일반적으로 양상(良相)으로 표기. 제35대 경덕왕 23년(764) 시중이 되어 비교적 장기간인 4년 9개월 동안 재임하였다. 혜공왕 10년(774)에는 상대등에 보임되었다가 6년 뒤 일으킨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즉위하였다. 771년 조영된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에는 대각간 김옹(金邕)과 함께 주종을 책임진 검교사(檢校使)로서 숙정대령(肅正臺令) 및 수성부령(修城府令) 등의 관직을 겸직하고 각간의 관등을 보유한 상태였음이 확인된다.
[A-00-437]효방(孝方)
신라 제37대 선덕왕의 아버지. 효방(孝芳)으로도 표기. 선덕왕은 즉위하면서 아버지 효방을 개성(開聖)대왕으로 추봉해서 종묘에 입묘시켰다. 그의 아내인 사소(四炤)부인은 성덕왕의 딸이다.
[A-00-438]원훈(元訓)
신라 제37대 선덕왕 김양상의 할아버지. 성덕왕 원년(702) 9월부터 2년(703) 7월까지 약 10개월간 아찬으로서 시중을 역임하였다. 선덕왕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효방을 개성대왕으로 추봉해 외조부 성덕왕과 함께 종묘에 입묘시켰으나 할아버지 원훈을 추봉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외조부 성덕왕을 의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A-00-439]사소(四召)부인
신라 제37대 선덕왕의 어머니. 제33대 성덕왕의 딸로서 남편은 파진찬 효방. 선덕왕이 즉위한 뒤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책봉하였는데 아마도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던 듯하다.
[A-00-440]▽의태후(▽懿太后)
신라 제37대 선덕왕 어머니 사소부인의 시호.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는 정의태후(貞懿太后)로 보정이 가능할 것 같다.
[A-00-441]구족(具足)왕후
신라 제37대 선덕왕의 왕비. 각간 양품(良品)의 딸. 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는 기록도 있다. 의공은 선덕왕이 즉위하면서 시중에 보임된 인물이므로 전자가 옳을 듯하다. 제38대 원성왕이 즉위하자 외궁(外宮)으로 보내어졌는데, 이때 벼 3만 4천 섬을 받았다고 한다.
[A-00-442]낭품(狼品)
신라 제37대 선덕왕의 왕비 구족왕후의 아버지. 양품(良品)으로도 표기. 각간을 역임하였다.
[A-00-443]원성왕(元聖王)
신라 제38대 왕. 제17대 나물왕의 12대손. 이름은 김경신(金敬信). 경신(敬愼)으로도 표기. 아버지는 효양(孝讓). 원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효양을 명덕(明德)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어머니는 박씨 지오(知烏), 또는 계오(繼烏)부인으로 창근(昌近) 이찬의 딸이며, 소문(昭文)태후로 추봉되었다. 왕비는 김씨 숙정(淑貞)부인으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김경신은 이찬으로서 780년 김양상을 도와서 혜공왕을 시해하는 모반 사건에 적극 가담하였다.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자 김경신은 상대등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국왕에 다음가는 제2인자로서 상재(上宰)인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 선덕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김경신은 군사력을 동원해 선수를 쳐서 왕궁을 먼저 장악하고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 아래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각각 대왕으로 추봉해 태종 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종묘에 당당하게 입묘시켰다. 원성왕에게는 인겸[仁謙: 혜충(惠忠)대왕으로 추봉], 의영[義英: 시호는 헌평(憲平)], 예영[禮英: 혜강(惠康)대왕으로 추봉]이란 이름의 세 아들과 대룡(大龍), 소룡(小龍)이란 두 딸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의 자식들은 아무도 즉위하지 못한 채 앞서 사망하고 손자 준옹이 소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원성왕은 사후 봉덕사의 남쪽에서 장사를 치르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원래 곡사(鵠寺)란 절이 있던 자리에다 무덤을 조영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원성대왕” 참조.
[A-00-444]경신(敬信)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 경신(敬愼)으로도 표기.
[A-00-445]「당서(唐書)」
앞서 나온 「당사」와 마찬가지로 「신당서」를 가리킨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 법민」조 “당서” 참조.
[A-00-446]경칙(敬則)
경신의 다른 이름. 「당서」에서 경신을 경칙으로 표기하였다고 하였으나, 현재의 「신당서」나 「구당서」에서는 그런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찬자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A-00-447]효양(孝讓)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로서 대아찬을 역임. 효양은 파진찬을 역임한 자신의 삼촌을 추모하기 위하여 암곡촌(暗谷村)에다 무장사(䥐藏寺)를 세웠다. 무장이란 곳은 원래 통일 전쟁이 마무리된 뒤 문무왕이 각종 병장기와 무구(武具) 등을 갈무리해 둔 곳인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원성왕의 일가가 하필 그런 곳에다 원찰로서의 무장사를 세운 것은 집안과의 어떤 관련성을 유추하게 한다. 원성왕은 즉위하자 곧장 아버지 효양을 명덕(明德)대왕으로, 할아버지 위문(魏文)을 흥평(興平)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5묘제로 편성된 종묘에 그들을 입묘시키기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 과연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을 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태종 무열왕 및 문무왕과 나란히 종묘에 입묘시켰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효양” 참조.
[A-00-448]명덕대왕(明德大王)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孝讓)의 추봉 왕호. 추봉됨으로써 종묘에 입묘되었다.
[A-00-449]인▽(仁▽)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어머니 이름 가운데 하나.
[A-00-450]지오(知烏)부인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어머니. 성은 박씨로 이찬 창근(昌近)의 딸. 「삼국사기」에는 지오가 계오(繼烏)로 되어 있다. 사망한 뒤에는 소문(昭文)왕후로 추봉되었다.
[A-00-451]소문(昭文)왕후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어머니인 계오(또는 지오)부인의 추봉호. 758년 세워진 뒤 수십 년이 지나 원성왕 대에 이르러 새로 새긴 「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사진 1]에 경신(敬信)대왕의 어머니를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라고 한 이름이 보인다.
[A-00-452]창근(昌近)
: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아버지. 성은 박씨. 이찬을 역임. 「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에 의하면 그의 소생으로는 소문왕후 외에도 원성왕의 유모로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다른 딸과 함께 아들인 영묘사(零妙寺)의 승려 언적법사(言寂法師)가 있었다. 9세기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에는 처남으로서 김원량(金元良)이란 인물이 확인된다.
[A-00-453]숙정(淑貞)부인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왕비. 성은 김씨로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A-00-454]신술(神述)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왕비인 숙정부인의 아버지. 성은 김씨로서 각간을 역임하였다. 혜공왕 대에 세워졌으리라 추정되는 「사천선진리신라비(泗川船津里新羅碑)」에는 총관(總管)의 직임을 맡았다고 되어 있다. 사천 지역을 관장한 청주(菁州)의 총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A-00-455]곡사(鵠寺)
원래 현재의 괘릉(掛陵), 즉 원성왕릉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절. 거기에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어 곡사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896년 최치원이 지은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에 의하면 곡사는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昭文)왕후의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肅貞)왕후에게는 외조부이기도 한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세웠다. 그런데 798년 12월 29일 원성왕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절터가 길지(吉地)로 지목되어 왕릉으로 바꾸었다. 이때 대체된 곡사는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산자락으로 옮겨져 같은 이름으로 조영되었다. 제48대 경문왕 대에 대대적인 중창을 거쳐서 제49대 헌강왕 대에는 절 이름도 숭복사로 바꾸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곡사” 참조.
[A-00-456]숭복사(崇福寺)
현재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에 있던 절. 원래는 괘릉, 즉 원성왕릉 일대에 자리하여 곡사로 불렸으나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일대가 왕릉으로 바뀜으로써 대토(代土)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곡사는 이후 오래도록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제48대 경문왕이 즉위하면서 원성왕 후예들의 대동단결을 겨냥해 왕릉의 능역을 새로이 꾸미는 한편 곡사의 중창을 도모하였다. 헌강왕 11년(885)에는 절의 이름까지 그에 어우러지게 숭복사로 고쳤다. 근자에 숭복사 터의 발굴을 통해 금당과 강당을 비롯한 가람 배치의 대강이 확인되었다. 동서 3층의 석탑 2기가 무너진 채 남아 있었는데 최근 원형을 복원하였다. 석탑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대숭복사비」는 파괴되고 비문의 내용만 전해진다. 원래 귀부는 현장에 남아 있었으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으며 현장에는 비가 최근 복원되어 세워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숭복사” 참조.
[A-00-457]최치원(崔致遠)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857년 왕경에서 출생하였으나 구체적인 사망 시점은 불명이다. 아버지는 6두품 출신의 최견일(崔肩逸)로, 곡사의 재 창건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12세 되던 해인 868년 입당(入唐)해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876년 율수현위(栗水縣位) 등 관직을 역임하다가 885년 귀국. 이후 신라에서 문한(文翰) 관련 관직과 함께 몇몇 지방의 태수를 거쳤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894년에는 무너지던 신라의 구원을 겨냥한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898년 돌연 왕경을 떠나 가족을 이끌고 자신의 친형이 주석하던 해인사로 들어가 이를 거점으로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마한」조 “최치원” 참조.
[A-00-458]최치원(崔致遠)이 ▽한 비
이 부분은 자칫 최치원이 지은 비가 원성왕릉에 있는 것으로 오인될 소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비는 현재의 숭복사에 있었는데 일연이 실물을 직접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정식 명칭은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 이를 줄여서 흔히 대숭복사비라고 통칭한다. 최치원이 귀국하던 885년 헌강왕으로부터 비문 작성을 지시받았으나 이듬해 헌강왕, 뒤이어 정강왕(定康王)이 사망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0여 년이 지난 진성여왕 10년(896)에 이르러 비로소 비문을 완성하였다. 비 자체는 깨어져 없어지고 쌍(双) 귀부만이 남아 현장에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서 관리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최치원이 지은 다른 3점의 선사비(禪師碑)와 함께 묶여 조선 후기부터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불리면서 많은 주석이 행해져 사본(寫本)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1년 이후 숭복사 주변 조사나 발굴을 통하여 10여 점의 비편이 수습되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최근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대숭복사비」가 복원되어 현장에 세워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최치원이 지은 비” 참조.
[A-00-459]소성왕(昭聖王)
신라 제39대 왕. 소성왕(昭成王)으로도 표기. 이름은 준옹(俊邕). 아버지는 원성왕의 태자였던 인겸(仁謙). 전왕인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인 셈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성목(聖穆)태후. 왕비는 계화(桂花)부인으로 대아찬 숙명(叔明 또는 夙明)의 딸. 원성왕이 즉위하던 해(785)에 태자로 책립한 장남 인겸이 6년 뒤(791)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듬해에 인겸의 동생 의영(義英)을 태자로 책립하였으나 역시 2년 만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원성왕이 재위 11년(795) 인겸의 아들인 손자 준옹을 태자로 책립함으로써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인겸이 사망하던 바로 그해에 시중으로 있던 종기(宗基)가 물러나고 대아찬으로서 준옹(俊邕)이 그 뒤를 이었다. 준옹은 시중직 1년 만인 이듬해 병으로 물러났다. 만일 시중을 역임한 준옹이란 인물이 바로 소성왕이라면 특이한 경력을 거쳐서 즉위한 셈이 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탑상 제4 「무장사 미타전」조 “소성대왕” 참조.
[A-00-460]혜충태자(惠忠太子)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이름은 인겸. 원성왕이 즉위하던 785년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6년 만인 791년 정월 사망하였다. 이에 혜충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애장왕은 재위 2년(801) 기존 5묘를 대대적으로 바꾸어 불천위(不遷位)였던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별립(別立)시키고 대신 시조대왕을 비롯하여 자신의 직계인 고조부 명덕, 증조부 원성, 조부 혜충, 아버지 소성왕을 종묘에 입묘시켰다. 이로 미루어 5묘에 입묘시키기 위해 바로 직전 혜충을 대왕으로 추봉한 것 같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혜충태자” 참조.
[A-00-461]성목(聖穆)태후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어머니. 김씨. 혜충태자 인겸의 비. 소성왕이 즉위하던 해에 추봉되었다.
[A-00-462]계화(桂花)왕후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왕비. 재위 2년(800) 왕후로 책봉되었다가 애장왕 6년(805)에는 대왕후(大王后)로 봉해졌다. 숙씨라고도 하였으나 김씨로서 나물왕 13세손 대아찬 숙명(叔明) 또는 숙명(夙明)의 딸이다. 소성왕이 사망하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아미타불상 1구와 신중(神衆)을 만들어 무장사의 아미타전(阿彌陁殿)에 안치시키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현재 무장사에는 삼층 석탑과 함께 비의 이수 및 쌍 귀부가 있다. 아미타여래조상비로 추정되는 비편이 현재 3점 발견되었다. 찬자(撰者) 혹은 서자(書者)가 애장왕 10년(809)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육진(金陸珍)이란 점이 주목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비문 내용이 본서 권3 탑상편 「무장사아미타전」조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일연이 현장을 탐방해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A-00-463]숙명공(夙明公)
숙명(淑明, 숙명(叔明))이라고도 한다. 대아찬을 역임하였다. 제39대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의 아버지이다. 김씨로서 제17대 나물왕의 13세손이다.
[A-00-464]애장왕(哀莊王)
신라 제40대 왕. 이름은 청명(淸明)인데 즉위하면서 중희(重熙)로 고쳤다. 제39대 소성왕의 장남. 어머니는 계화(桂花)부인으로 대아찬 숙명(淑明)의 딸. 소성왕 2년(800)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바로 그해에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실력자였던 숙부 언승(彦昇)이 병부령으로서 섭정하였다. 애장왕이 성년이 되던 재위 6년(805) 무렵부터 숙부 언승과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한 듯하다. 재위 10년(809) 되던 해의 7월 19일 언승이 자신의 동생들을 동원해 궁내로 난입해 애장왕과 그를 호위하던 왕의 아우 체명(體明)을 죽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조설」조 “애장왕” 참조.
[A-00-465]중희(重熙)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이름. 애장왕의 원래 이름은 청명인데 즉위하면서 중희로 고쳤다.
[A-00-466]청명(淸明)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원래 이름. 즉위하면서 중희로 바꾸었다.
[A-00-467]7월 19일
반란이 일어난 월일까지 명시한 점이 특이하다. 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毗曇)의 난이나 신문왕 즉위년(681)에 일어난 김흠돌(金欽突)의 난 등이 월일까지 세세하게 기록된 사정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A-00-468]헌덕(憲德)
신라 제41대 헌덕왕. 이름은 언승(彦昇)이며, 헌덕은 시호. 헌덕이 시호인데도 이를 갖고 이름으로 사용한 한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이들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잇달아 즉위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일지도 모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조설」조 “헌덕왕” 참조.
[A-00-469]흥덕(興德):
신라 제42대 흥덕왕. 원래의 이름은 수종(秀宗). 뒷날 경휘(景徽 또는 景暉)로 고쳤다. 흥덕이 당시 이름이 아닌 시호임에도 이름처럼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이들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잇달아 즉위하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인지 모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흥덕왕 앵무」조 “흥덕대왕” 참조.
[A-00-470]헌덕왕(憲德王)
신라 제41대 왕. 이름은 언승(彦升 또는 彦昇). 제39대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며, 제40대 애장왕의 숙부. 아버지는 인겸태자, 즉 추봉된 혜충대왕이며 할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 어머니는 김씨로서 성목(聖穆)태후. 왕비는 귀승(貴勝)부인으로 예영(禮英) 각간의 딸이다. 예영이 아버지인 인겸의 아우이므로 헌덕왕과 귀승부인은 사촌 사이인 셈이다. 본 왕력편에서는 왕비를 귀승랑(貴勝娘)이라 하면서 예영이 아닌 충공(忠恭) 각간의 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귀승 외에 다른 왕비의 존재도 상정 가능해진다. 충공은 헌덕왕의 친동생이므로 이 역시 조카와의 근친혼인 셈이다. 어쩌면 두 차례에 걸쳐 혼인했을 여지도 없지 않다. 헌덕왕은 자신들의 여러 아우들과 공모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뒷날 헌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굳이 동생인 수종(흥덕왕)을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사정이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조설」조 “헌덕왕” 참조.
[A-00-471]언승(彦升)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이름. 원성왕 6년(790)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대아찬이 되었다. 이듬해 이찬 제공(悌恭)이 모반하였을 때 진압을 주도하여 잡찬(迊湌)으로 승진하였다. 원성왕 10년(794)에는 시중이 되고 11년(795)에 재상, 12년(796)에 병부령이 되었다. 이처럼 이미 할아버지인 원성왕 대부터 승승장구하였다. 800년에 조카인 애장왕이 즉위하자 병부령으로서 섭정을 맡아 당시 신설된 어룡성(御龍省)의 사신(私臣)까지 겸직하다가 곧바로 상대등에 취임하였다. 여러 핵심 요직을 겸직해 실력자로서 전권을 휘두른 듯하다. 이런 현실적 실력을 배경으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할 수 있었다.
[A-00-472]귀승랑(貴勝娘)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왕비. 랑(娘)은 여성의 이름에 붙이는 존칭 어미이므로 귀승이 이름인 셈이다. 「삼국사기」에 귀승이라고 한 사실과 일치한다. 시호는 황아(皇娥). 아버지를 「삼국사기」에서는 헌덕왕의 숙부인 예영(禮英)이라 하였으나, 본 왕력편에서는 헌덕왕의 막냇동생인 충공(忠恭)이라 하여 차이가 난다. 귀승의 성씨를 정(貞) 또는 진(眞)이라 한 기록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실수이거나 당과의 외교적 필요성에서 취한 의도적 조치로 보인다.
[A-00-473]황아(皇娥)왕후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왕비. 원래 이름은 귀승이며 황아는 그 시호.
[A-00-474]충공(忠恭)
일명 중공(仲恭). 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태자, 즉 추봉된 혜충대왕. 어머니는 김씨 성목(聖穆)태후. 아내는 박씨 귀보(貴寶)부인으로 뒷날 아들인 제44대 민애왕에 의해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되었다. 제41대 헌덕왕과 제42대 흥덕왕이 그의 친형이고 제44대 민애왕은 그의 아들이다. 딸인 귀승(시호는 황아왕후)이 헌덕왕의 왕비가 되었다.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의 왕비인 문목(文穆)부인도 그의 딸이다. 딸인 정교(貞敎)가 헌덕왕의 태자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태자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그 실체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애장왕 9년(808) 맏형인 언승과 함께 당나라 덕종(德宗) 황제로부터 문극(門戟)을 하사받았다. 그 이듬해에 두 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의 시해 사건에 가담한 듯하다. 헌덕왕 9년(817)에는 이찬으로서 시중에 보임되고 14년(822)에는 상대등이 되면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바로 이해에 김헌창(金憲昌)이 난을 일으키자 동남방면의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893년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비문(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 의하면 형인 수종(흥덕왕)이 즉위하였을 때 선강(宣康)태자로서 당시 국정 전반을 감무(監撫)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흥덕왕이 사망하기 얼마 전 죽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3년(821)조에는 시중 충공이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나 이는 오류이거나 동명이인이라 봄이 일반적이다. 그의 아들인 제44대 민애왕은 즉위하자마자 충공을 선강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제48대 경문왕(景文王) 3년(863)에 작성된 대구 팔공산 동화사의 「민애왕석탑사리함기」에서 선강대왕이란 추봉 시호가 확인된다.
[A-00-475]천림촌(泉林村)
헌덕왕릉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8년(826)조에는 헌덕왕을 천림사(泉林寺)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헌덕왕릉을 경주부(慶州府) 동쪽의 천림리(泉林里)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천림촌은 천림사의 잘못이거나 아니면 천림사가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4년(715)조에 가뭄이 들자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기우제를 지냈다는 임천사(林泉寺)도 일반적으로 같은 곳이라 보고 있다. 현재 헌덕왕릉은 알천(閼川 또는 북천(北川)) 북쪽의 동천동에 위치한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부근에는 석조(石槽)를 비롯한 탑의 옥개석이 산재하여 절터가 존재하였음이 확인된 바 있다.
[A-00-476]흥덕왕(興德王)
신라 제42대 왕. 원래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수승(秀升)이었는데 즉위한 뒤 경휘(景徽 또는 景暉)로 고쳤다. 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의 장남인 인겸(仁謙)태자, 즉 추봉 혜성(惠忠)대왕. 어머니는 김씨로서 성목(聖穆)태후. 왕비는 자신의 맏형인 제39대 소성왕의 딸 장화(章和) 또는 창화(昌花)부인. 장화부인은 흥덕왕이 즉위하던 바로 그해에 사망해 정목(定穆)왕후로 추봉되었다. 제39대 소성왕과 제41대 헌덕왕의 동복아우이기도 하다. 제40대 애장왕은 그의 조카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흥덕왕 앵무」조 “흥덕대왕” 참조.
[A-00-477]경휘(景暉)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이름 가운데 하나. 원래 수종(秀宗) 또는 수승(秀升)이라 하였으나 즉위한 뒤 경휘로 고쳤다.
[A-00-478]창화(昌花)부인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장화(章和)로도 표기. 아버지는 제39대 소성왕이며 어머니는 계화부인. 흥덕왕에게는 조카이므로 숙질 사이의 근친혼을 한 셈이다. 흥덕왕이 즉위한 직후에 사망하여 정목(定穆)왕후로 추봉되었다. 이후 흥덕왕은 순애보적인 사랑을 보여 주변에서 재혼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여자를 멀리하였다고 한다. 흥덕왕 2년(827) 당나라에서 왕비 박씨를 책봉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잘못이거나 아니면 외교적인 술책에서 박씨를 칭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흥덕왕이 죽음에 직면해 장화부인과 합장하도록 각별히 유언한 사실도 그의 애틋한 순애보를 입증한다.
[A-00-479]정목(定穆)왕후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장화(또는 창화)부인의 시호. 흥덕왕이 즉위하던 해의 12월에 사망하여 정목왕후로 추봉되었다.
[A-00-480]안강(安康)
현재 경주시 북쪽에 있는 안강읍. 본래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대에 지명을 안강으로 고쳤다. 양주(良州) 소속으로서 오늘날 포항의 흥해읍에 군치를 둔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이었다. 조선 태조 때에 이르러 경주의 속현으로 편입되었다.
[A-00-481]비화양(比火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의 옛 지명. 비화는 안강 가운데 그 중심지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A-00-482]창화왕비와 합장되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이 즉위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창화왕비가 사망하였다. 이에 흥덕왕은 재혼은 물론 어떤 여성과도 가까이하지 않다가 죽음에 직면해 합장하도록 유언하였다. 이에 따라 흥덕왕의 주검은 왕비와 합장된 듯하다. 현재 흥덕왕릉은 경주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해 있다. 무덤 주변에 각종 석물을 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능비까지 세웠다. 현재 흥덕왕릉에는 규모가 큰 귀부만 남아 있을 따름이며 비는 파괴되었다. 지금껏 주변 일대에서 60여 점의 비편이 수습되었다. 그 가운데 흥덕(興德)이란 전서(篆書)의 전액과 함께 61세에 병환으로 사망한 사실을 추정하게 하는 비편이 확인되었다. 다만, 이 비는 흥덕왕이 사망한 당시가 아니라 무려 30여 년이 지난 뒤인 경문왕 대 무렵 세워진 점이 특징적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흥덕왕 앵무」조 내용 참조.
[A-00-483]희강왕(僖康王)
신라 제43대 왕. 이름은 제륭(悌隆), 개륭(愷隆) 또는 제옹(悌顒) 등. 다만 제륭과 개륭은 글자 모양이 매우 비슷해 어느 한쪽은 잘못된 표기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金憲貞, 또는 金獻貞)인데 희강왕이 익성(翌成)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어머니는 박씨로 포도(包道)부인인데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되었다. 왕비는 문목(文穆)부인으로 충공, 즉 추봉된 선강대왕의 딸이다. 흥덕왕이 재위 11년(836) 만에 후사 없이 사망하자 희강왕은 자신의 삼촌인 김균정(金均貞)과 왕위 다툼을 벌였다. 이때 시중으로 있던 처남 김명(金明)의 도움을 얻어 승리함으로써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위 3년째(838) 되던 해에 자신의 즉위를 도운 김명과 시중인 이홍(利弘)의 간섭과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결하였다.
[A-00-484]개륭(愷隆):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이름. 「삼국사기」에서는 제륭(悌隆)이라고도 하였는데 글자체로 보아 어느 한쪽은 잘못일지 모른다. 제옹이란 또 다른 이름도 보인다.
[A-00-485]제옹(悌顒)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이름 가운데 하나. 제륭 또는 개륭이라고도 하였다.
[A-00-486]헌진(憲眞)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아버지. 달리 초노(草奴)란 이름도 있다. 아내는 박씨 포도(包道)부인. 「삼국사기」에서는 헌정(憲貞)이라 하였는데 진(眞)과 정(貞)의 글자체가 비슷한 데서 빚어진 잘못으로 여겨진다. 헌정이 올바른 듯하다. 813년 작성된 경남 산청에 위치한 단속사(斷俗寺)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의 찬자(撰者)로서 ‘황당위위경국상병부령겸수성부령이간(皇唐衛尉卿國相兵部令兼修城府令伊干)’의 직함을 가진 김헌정이 바로 그 사람이다. 제38대 원성왕의 셋째 아들인 예영(禮英)의 장남이다. 헌덕왕 2년(810) 사망한 당 황제 순종(順宗)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입당한 신라 왕자 김헌장(金憲章)과도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헌장에 대해 일부 중국 측 기록에서는 헌덕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8년(807)조에서 이때 시중으로 지명되었다는 김헌창(金憲昌)도 김헌정의 잘못으로 보인다. 김헌창은 뒷날 헌덕왕 6년(814)에 시중으로 보임되었다. 헌덕왕 11년(819) 헌정은 병들어 걷기조차 곤란해져 70세가 되기 이전임에도 금으로 장식한 지팡이를 받고서 은퇴하였다고 한다.
[A-00-487]흥성(興聖)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아버지 김헌정의 추존 시호. 희강왕 재위 2년(837) 추봉되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익성(翌成)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흥(興)과 익(翌)의 글자체가 비슷한 데서 빚어진 착오일지도 모른다.
[A-00-488]▽성(▽成)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아버지 김헌정의 추존 시호. 「삼국사기」에서는 이때 익성(翌成)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성은 익성으로 추정된다.
[A-00-489]예영(禮英)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 효진(孝眞)이라고도 한다. 두 형인 인겸(仁謙)과 의영(義英)은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의영이 사망하자 원성왕은 인겸의 아들이며 자신의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책립하였다. 이 무렵 이후 예영의 활동상은 기록상 드러나지 않는다. 예영에게는 헌정과 균정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균정의 아들인 우징이 마침내 제45대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해 아버지를 성덕(成德)대왕,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惠康)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이후 예영의 후예들이 계속 왕위를 이어 감으로써 한동안 신라 하대 왕조의 주류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예영” 참조.
[A-00-490]미도(美道)부인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어머니. 김헌정, 즉 추존 익성대왕의 왕비. 심내(深乃), 파리(巴利)부인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박씨 포도(包道)부인으로 되어 있다. 희강왕 2년(837) 순성(順成)태후로 추봉되었다.
[A-00-491]심내(深乃)부인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어머니. 미도 또는 파리부인이라고도 한다. 희강왕 2년(837) 순성(順成)태후로 추봉되었다.
[A-00-492]파리(巴利)부인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어머니. 미도 또는 심내라고도 한다. 희강왕 2년(837) 순성(順成)태후로 추봉되었다.
[A-00-493]순성(順成)태: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어머니 미도부인의 추봉 시호. 희강왕 2년(837) 추봉되었다.
[A-00-494]충▽(忠▽)
신라 제43대 희강왕 어머니 미도부인의 아버지로서 구체적인 이름이나 관력 등은 드러나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A-00-495]문목(文穆)왕후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왕비. 선강대왕으로 추봉된 충공의 딸. 제44대 민애왕의 누이.
[A-00-496]충효(忠孝)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왕후의 아버지. 충공(忠恭)의 표기상 잘못이거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A-00-497]중공(重恭)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왕후의 아버지. 충공의 잘못된 표기인지 혹은 단순한 이표기인지 분명하지 않다. 제42대 흥덕왕 대에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도중에 사망한 듯하다. 뒷날 아들인 제44대 민애왕에 의해 선강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충공” 참조.
[A-00-498]민애왕(閔哀王)
신라 제44대 왕. 민애왕(敏哀王)으로도 표기한다. 이름은 명(明). 아버지는 선강(宣康)대왕으로 추봉된 충공(忠恭). 어머니는 박씨이며 선의(宣懿)태후로 추봉된 귀보(貴寶)부인. 본 왕력편에서는 귀보부인을 혜충(대)왕, 즉 인겸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충공과 귀보가 남매지간으로 혼인한 셈이 되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충공의 아내인 귀보부인이 박씨라는 사실은 인겸의 딸이 아님을 방증한다. 왕비는 각간 영공(永公)의 딸 무용(无容) 또는 윤용(允容)왕후이다. 김명은 흥덕왕 10년(835) 나이가 미처 20세가 되기도 전에 우징(祐徵)의 뒤를 이어 시중을 역임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흥덕왕이 사망한 후 우징(신무왕)의 아버지 김균정(金均貞)과 그 조카인 제륭(悌隆)이 왕위 다툼을 벌였을 때 자신의 매부이기도 한 제륭을 지원해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김명은 희강왕 2년(837) 상대등에 보임되어 실력자로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이듬해에는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희강왕을 핍박해 자결하게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년 뒤인 839년 청해진에 몸을 의탁해 있다가 장보고(張保皐)로부터 병력을 빌린 우징과 김양(金陽)의 공격을 받았다. 우징의 군사는 달구벌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왕경까지 나아가 민애왕을 죽였다. 제48대 경문왕이 재위 3년(863) 분열된 제38대 원성왕 후예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는 뜻에서 제41대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心地)가 창건한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 민애왕을 추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3층의 석탑을 세웠다. 이때 사리를 담음 납석제의 항아리를 석탑 내부에 안치하였는데 여기에 전후의 내막의 일단이 기록되어 있다.
[A-00-499]명(明)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이름. 제42대 흥덕왕 대에 시중을 역임하였다.
[A-00-500]충공(忠恭)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중공(重恭)으로도 표기.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충공” 참조.
[A-00-501]선강(宣康)대왕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인 충공의 추봉 시호.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충공” 참조
.
[A-00-502]혜충왕(惠忠王)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원래 이름은 인겸. 원성왕이 즉위한 785년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6년 만인 791년 정월에 사망. 이에 혜충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손자인 애장왕이 재위 2년(801) 할아버지를 5묘에 입묘시키기 위해 혜충태자를 높여 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혜충태자” 참조.
[A-00-503]귀파(貴巴)부인
귀보(貴寶)부인이라고도 한다. 선강대왕으로 추봉된 충공의 부인이며 제44대 민애왕의 어머니. 본 왕력편에서는 귀파부인을 혜충대왕 인겸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귀파와 충공이 남매지간으로 부부가 된 셈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삼국사기」에서 귀보부인의 성을 박씨라고 한 사실도 그를 방증한다. 뒷날 아들인 민애왕이 즉위하면서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하였다.
[A-00-504]선의(宣懿)왕후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어머니의 추봉 시호. 원래 이름은 귀파 또는 귀보.
[A-00-505]무용(无容)황후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왕비. 각간 영공(永公)의 딸.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민애왕의 왕비를 윤용(允容)이라 하였다. 무(无)와 윤(允)의 글자체가 비슷한 데서 빚어진 잘못일 가능성이 크다.
[A-00-506]영공(永公)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왕비인 무용(윤용)왕후의 아버지. 각간을 역임하였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3년(821)조에 의하면 이 해에 이찬으로서 시중에 보임되고 이후 흥덕왕 2년(827)에 물러난 인물로서 영공(永恭)이 보인다. 활동 시기나 관직 및 관등 등으로 볼 때 영공(永公)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시중 재임 기간이 6년 4개월로 무척 긴 편에 속함이 특징적이다.
[A-00-507]신무왕(神武王)
신라 제45대 왕. 839년 한 해 동안만 재위. 이름은 우징(祐徵) 또는 우징(佑徵)으로도 표기. 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서 사후 성덕(成德)대왕으로 추봉된 김균정(金均貞). 어머니는 박씨로서 이름은 진교(眞矯) 또는 정교(貞矯)인데, 정(貞)은 진(眞)과 글자체가 비슷한 데서 빚어진 착각일 듯하다. 왕비는 정계(貞繼)부인인데, 사후 정종(定宗) 혹은 정종(貞宗)태후로 추봉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신무대왕 염장궁파」조 “신무대왕” 참조.
[A-00-508]우징(佑徵)
우징(祐徵)으로도 표기.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이름.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신무대왕 염장궁파」조 “신무대왕” 참조.
[A-00-509]균정(均貞)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들인 추존 혜강(惠康)대왕인 예영(禮英)의 아들. 제45대 신무왕의 아버지. 신무왕이 즉위해 성덕(成德)대왕으로 추봉. 아내는 박씨로서 진교(眞矯) 혹은 정교(貞矯)부인이며, 헌목(憲穆)태후로 추봉되었다. 애장왕 2년(801) 당시 고조된 일본과의 긴장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균정을 대아찬으로 제수하여 일본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본인이 강하게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헌덕왕 4년(812) 시중에 보임되었다가 2년 뒤에 물러났다. 822년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웅원(雄元) 및 우징과 함께 출정해 성산(星山)에서 반군을 깨트리는 군공을 세웠다. 흥덕왕 10년(835)에는 상대등으로 보임되었다. 바로 이듬해 흥덕왕이 사망하자 승계를 노렸으나 조카인 제륭과의 다툼에서 패배해 죽임을 당하였다. 신무왕에 대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신무대왕 염장궁파」조 “신무대왕” 참조.
[A-00-510]성덕(成德)대왕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아버지 김균정의 추봉 시호. 제46대 문성왕 8년(846) 작성된 「법광사석탑지(法光寺石塔誌)」에서 성덕대왕이 확인된다. 826년 세워졌던 탑을 손자인 문성왕이 이때 이전․수리하는 불사를 일으켰다. 아마도 성덕대왕 김균정이 살아 있을 때 단월(檀越)로서 법광사 창건에 큰 시주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A-00-511]정교(貞矯)부인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어머니. 박씨. 성덕대왕으로 추봉된 김균정의 부인. 신무왕이 즉위하던 해인 839년 헌목(憲穆)태후로 추봉. 「삼국사기」에서는 진교(眞矯)라 하였는데 진(眞)과 정(貞)의 글자체가 비슷한 데서 빚어진 착란으로 보인다.
[A-00-512]예영(禮英)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막내아들. 효진(孝眞)이라고도 한다. 본편 주489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예영” 참조.
[A-00-513]혜강(惠康)대왕
예영의 추봉 시호. 839년 손자인 제45대 신무왕이 즉위하면서 추봉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예영” 참조
.
[A-00-514]▽종(▽從) 또는 계(繼)태후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왕비 이름이 열거된 부분. 누락이 있는 까닭에 이것만으로는 각각이 이름인지, 아니면 이름과 시호가 섞인 것인지 등등 분명하지 않다. 원래 우징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군사력을 빌려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약속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함께 예상치 않은 이른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문성왕 즉위년(839)조에는 어머니가 정계(貞繼)부인 혹은 정종(定宗)태후로 되어 있다. 본 왕력편 「문성왕」조에는 어머니가 진종(眞宗)태후로 되어 있다.
[A-00-515]▽명(▽明) 해▽(海▽)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왕비 아버지 이름. 아마도 ▽명(▽明)은 이름이며, 해▽(海▽)는 17관등 가운데 세 번째인 해간(海干), 즉 파진찬일 가능성이 크다.
[A-00-516]문성왕(文聖王)
신라 제46대 왕. 원래 이름은 경응(慶膺). 아버지는 제45대 신무왕. 어머니는 정계(貞繼)부인으로 추봉 시호가 정종(定宗) 또는 진종(眞宗)태후. 신무왕이 즉위하면서 경응을 태자로 책립하였다. 바로 그해에 신무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왕비는 소명(炤明)왕후이나 실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문제가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조설」조 “문성왕” 참조.
[A-00-517]경응(慶膺)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이름. 재위 4년(842) 조성된 「염거화상탑지(廉居和尙塔誌)」에는 경응대왕으로, 문성왕 17년(855)에 작성된 「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에는 ‘국왕경응(國王慶膺)’으로 나온다.
[A-00-518]진종(眞宗)태후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어머니 정계(貞繼)부인의 추봉 시호. 정종(定宗)태후라고도 한다.
[A-00-519]소명(炤明)왕후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왕비. 문성왕이 재위 4년(842)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이찬 위흔(魏昕), 즉 김양(金陽)의 딸인 듯하다.
[A-00-520]헌안왕(憲安王)
신라 제47대 왕. 이름은 의정(誼靖) 또는 우정(祐靖). 헌안왕 2년(858) 조성된 전남 장흥의 「보림사비로자나불조상기(寶林寺毘盧舍那佛造像記)」에는 이름을 줄여서 정왕(情王)으로, 제48대 경문왕이 재위 10년(870) 헌안왕의 추복을 위해 건립한 장흥 「보림사석탑지(寶林寺石塔誌)」에는 시호를 줄여서 헌왕(憲王)이라 표기하였다. 제45대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 어머니는 흔명(昕明) 또는 조명(照明)부인으로 선강(宣康)대왕으로 추봉된 충공의 딸이다. 문성왕이 사망하기 직전 유조를 내려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써 즉위할 수 있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하는데, 당시 왕실 내부의 어떤 정치적 암투가 깊숙이 개재되었을 여지가 엿보인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재위 5년(861) 사망하였다. 딸만 낳은 헌안왕이 화랑 출신의 사위인 응렴(膺廉)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게 된 것도 그런 사정과 연관될 가능성이 크다. 문성왕과 마찬가지로 공작지에 장사 지냈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48 경문대왕」조 “헌안대왕” 참조.
[A-00-521]의정(誼靖)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이름. 흥덕왕 11년(836) 사은사(謝恩使) 겸 숙위(宿衛)로서 당나라에 파견된 적이 있는 왕자 김의종(金義琮)이나, 제46대 문성왕 11년(849) 예징(禮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상대등의 직에 오른 의정(義正)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주장이 있는데,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온당할 듯하다.
[A-00-522]흔명(昕明)부인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照明)부인이라고도 한다. 선강대왕으로 추봉된 충공의 딸. 성덕대왕으로 추봉된 김균정의 두 번째 부인. 첫째 부인은 박씨로서 헌목(憲穆)태후로 추봉된 정교(貞矯) 혹은 진교(眞矯)부인이다.
[A-00-523]경문왕(景文王)
신라 제48대 왕. 원래 이름은 응렴(膺廉) 또는 응렴(凝廉). 최치원이 진성여왕 4년(890)에 쓴 「성주사낭혜화상비(聖住寺朗慧和尙碑)」에는 당으로부터 추봉된 태사(太師)란 직함을 사용해 태사대왕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각간 계명(啓明)인데 뒷날 의공(懿恭 또는 義恭)대왕으로 추봉. 어머니는 광화(光和)부인으로 박씨이다. 이와는 달리 제45대 신무왕의 딸이란 기록도 있다. 뒷날 광의(光懿)왕태후로 추봉. 왕비는 영화(寧和)부인으로 제47대 헌안왕의 큰 딸인데 문의(文義) 또는 문자(文資)황후로 책봉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처남으로 제44대 민애왕이 된 김명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결한 제43대 희강왕이다. 그러나 경문왕은 그런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안왕의 사위가 됨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다. 응렴이 당시 유력한 화랑으로 널리 알려지자 헌안왕이 사위로 낙점하였다. 이는 아마도 딸만 둘뿐인 헌안왕의 치밀한 후계 구도 기획으로 추진된 것으로 여겨진다. 헌안왕의 아버지 김균정이 응렴의 할아버지 제륭(희강왕)에게 살해당한 사실을 떠올리면 양자는 적대적인 관계였을 법하다. 그런데도 헌안왕이 응렴을 사위로 삼아 후계자로 결정한 데에는 대대적인 화해를 도모하려는 어떤 의도가 깔렸을 듯하다. 특히 응렴의 아버지가 아직 생존한 상태였음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런 취지에 부응해 경문왕은 즉위 직후부터 하대 왕조의 사실상 개창자라 할 제38대 원성왕계 후예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원성왕릉을 재정비한다거나 원찰인 곡사(아들 헌강왕 대에 숭복사로 개칭)를 크게 중창한 사실, 민애왕을 추복해 동화사 석탑을 건립한 사실, 문성왕 이후 무너지고 있던 9층목탑을 개건한 사실 등을 두드러진 사례로서 손꼽을 수 있다. 경문왕은 그와 같은 시책을 추진해 나가면서 왕족 중심의 지배 체제 강화를 노려 스스로 황제임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그의 즉위 자체에 대한 반감은 물론 여러 작은 가계의 반발로 말미암아 추진 자체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것은 경문왕의 귀가 커졌다거나 평소 뱀과 더불어 살았다는 등속의 설화 속에 적절히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재위 기간 15년 동안 대규모 모반 사건이 세 차례나 일어난 것은 그런 실상을 방증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48 경문대왕」조 “경문왕” 참조.
[A-00-524]응렴(膺廉)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이름. 응렴(凝廉)으로도 표기. 경문왕 10년(870) 작성된 장흥 「보림사북탑지(寶林寺北塔誌)」에는 응왕(凝王)이라 하였다. 경문왕은 즉위하기 이전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896년 최치원이 지은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보인다. 신라가 삼국 통합을 달성한 중대에 들어와 관료들을 양성하는 주류의 자리는 국학(國學)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이후 화랑도 조직은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줄곧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문약(文弱)의 분위기, 당나라 유학생 우대 시책, 국학 출신의 배타적 결속 등으로 관료 조직 내부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무렵 쇠퇴의 길을 걸어온 화랑도가 점점 중시되어 가는 경향성을 보인 것도 그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일종의 복고풍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던 도중 화랑인 응렴의 두드러진 활동이 새로운 방안을 모색 중이던 헌안왕에게 포착되고 나아가 사위로 낙점된 것으로 보인다. 응렴은 혈통상 앞서 상당한 기간 왕위 계승의 주류였던 원성왕의 큰아들 인겸(仁謙) 계통이 아니라 그와 치열하게 경쟁하던 셋째 아들 예영(禮英) 계통이었으므로 그의 즉위에 대해 강한 반발이 뒤따랐을 터이다. 그런 측면에서 헌안왕의 후계 선정은 일종의 결단에 의한 조치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48 경문대왕」조 “경문왕” 참조.
[A-00-525]계명(啓明)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제43대 희강왕의 아들. 아내는 광화(光化)부인으로 박씨라는 기록과 함께 신무왕의 딸로 김씨라는 서로 다른 두 기록이 있다. 문성왕 10년(848) 파진찬으로서 시중이 되었으나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경문왕 재위 6년(866) 의공(懿恭 또는 義恭)대왕으로 추봉되었는데 바로 직전 사망한 듯하다.
[A-00-526]의공(義恭)대왕
의공(懿恭)으로도 표기. 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계명의 추봉 시호.
[A-00-527]광화(光和)부인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어머니. 경문왕 재위 6년(866) 광의(光懿)태후로 추봉되었다. 여기서는 신무왕의 딸이라 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박씨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A-00-528]문자왕후(文資皇后)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로 영화(寧花)부인이라고도 한다.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의 어머니이다. 제47대 헌안왕의 첫째 딸. 경문왕이 재위 6년(866) 문자황후로 책봉하였는데 문의(文懿)왕비라고도 한다. 진성여왕 5년(891) 작성된 전남 담양의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에 문의황후(文懿皇后)라 하였으므로 후자가 올바를 듯하다. 경문왕 10년(870) 사망하였다.
[A-00-529]헌강왕(憲康王)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獻康王)으로도 표기. 이름은 정(晸). 제48대 경문왕의 장남. 어머니는 문의왕후로 헌안왕의 첫째 딸. 왕비는 의명(懿明 또는 義明)부인.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즉위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모두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황룡사에 행차하여 불경을 강론하게 하였다거나 국학에 행차해 경서를 강의하게 한 사실 등으로부터 유추된다. 특히 나말의 몇몇 유명한 선사들 관련 비문과 함께 896년 최치원이 지은 「초월산대숭복사비」에서도 그런 면모가 확인된다. 진성여왕 7년(893) 최치원이 작성한 「봉암사지증대사비(鳳巖寺智證大師碑)」나 「성주사낭혜화상비」에서는 당으로부터 받은 봉호를 근거로 태부왕(太傅王)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헌강왕은 선승 낭혜(朗慧)를 일시나마 머물도록 한 상주(尙州) 심묘사(沈妙寺)의 사적비문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사후 보리사(菩提寺)의 남쪽에다 장사 지냈다고 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처용랑 망해사」조 “헌강대왕” 참조.
[A-00-530]정(晸)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이름.
[A-00-531]문자왕후(文資皇后)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인 영화(寧和)부인의 책봉 시호.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의 어머니이다. 관련 사항은 본조 각주 “문자왕후” 참조.
[A-00-532]의명(義明)왕후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왕비. 여기서는 어머니 문자왕후의 일명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중간에 왕비 관련 사항을 누락시킨 데서 빚어진 잘못이다.
[A-00-533]정강왕(定康王)
신라 제50대 왕. 이름은 황(晃). 제48대 경문왕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문자황후. 즉위하기 전 예부령(禮部令)을 지냈다. 평소 남궁(南宮)에 거주하였던 까닭에 당시 남궁상(南宮相)이라고도 불렸던 것 같다(「성주사낭혜화상비」). 재위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친형인 제49대 헌강왕과 마찬가지로 보리사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A-00-534]황(晃)
신라 제50대 정강왕의 이름.
[A-00-535]민애왕의 모제(母弟)이다.
신라 제50대 정강왕이 제44대 민애왕의 동모제일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이 민애왕은 제49대 헌강왕의 잘못일 듯하다.
[A-00-536]진성여왕(眞聖女王)
신라 제51대 왕. 이름은 만(曼). 최치원이 지은 글에서는 탄(坦)이라고도 하였다. 제48대 경문왕의 딸. 어머니는 문자황후. 제50대 정강왕이 즉위한 이듬해 5월 병석에서 시중 준흥(俊興)에게 과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사례를 본받아 여동생인 만을 즉위시키도록 유언하였다 한다. 신라의 세 번째 여왕. 태위(太尉)대왕이라고도 불렸다(「성주사낭혜화상비」). 「삼국사기」에서는 왕명을 여왕이라 하지 않았으나 본 왕력편에서는 예외를 두지 않고 3인 모두를 여왕이라 칭하는 특이한 역사 인식을 보인다. 즉위 2년(888)에 이르기까지 제48대 경문왕의 동생이면서 자신의 숙부인 위홍(魏弘)이 사실상 정사를 도맡았던 듯하다. 이를 「삼국사기」에서는 두 사람이 사통하는 관계로 묘사하였고 본 왕력편에서는 배필(配匹)이라고까지 기술하였다. 하지만 위홍에게는 진성여왕의 유모이기도 한 부호(鳧好)부인이라는 아내가 있었다. 당시 중앙의 지배 체제 전반이 해이해지면서 바야흐로 지방 세력이 곳곳에서 봉기해 후삼국이 분립하게 된 책임을 진성여왕에게 돌려 즉위 자체가 잘못임을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설정일지도 모른다. 재위 9년(895) 조카인 요(嶢)를 태자로 책립하였다가 11년(897) 양위(讓位)한 뒤 북궁(北宮)으로 물러나 6개월 뒤 사망하였다. 사후 황산(黃山)에다 장사 지냈다고도 하며, 화장해서 모량부 서쪽의 훼황산(卉黃山) 또는 미황산(未黃山)에 뿌렸다고도 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 “진성여대왕” 참조.
[A-00-537]만헌(曼憲)으로 ··· 누이동생이다.
이 부분의 원문은 ‘曼憲卽定康王之同母妹’이다. 진성여왕을 ‘만’이라 하였지만, ‘만헌’이라고 부른 사례는 달리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즉(卽)’을 ‘강(康)’의 잘못으로 보고 헌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올바를 듯하다.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헌강왕과 정강왕 및 진성여왕을 이모(異母)형제라고 간주한 견해도 있지만 이는 지나친 추정이다.
[A-00-538]▽▽ 대각간
▽▽는 전후 맥락이나 뒤이은 혜성대왕으로 보아 위홍(魏弘)이 들어갈 자리인 듯하다. 대각간은 대서발한(大舒發翰), 대일벌간(大一伐干) 등으로도 불린 최고의 관등이다. 그 위에 때로는 태대각간(太大角干)까지 두어졌다. 양자는 6세기 초 17개의 등급으로 완성되는 관등의 최고위인 각간 위에 두어진 비상위(非常位)로서, 전공(戰功)이나 군공(軍功)을 비롯한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졌다. 당시 대각간이 될 만한 인물로는 위홍밖에 없었다. 위홍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혜성대왕” 참조.
[A-00-539]혜성(惠成)대왕
대각간 위홍(魏弘)의 추봉 시호.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 아버지는 뒷날 의공(懿恭, 義恭)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계명(啓明). 어머니는 박씨 광화(光和)부인. 진성여왕 2년(888) 사망하여 곧바로 혜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정리한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진성여왕 대에 최치원이 쓴 「성주사낭혜화상비」에서는 위홍을 ‘태제상국(太弟相國)’이라 하였고, 역시 「초월산대숭복사비」에서도 같은 문구가 확인된다. 이 직함은 경문왕 즉위 이후 위홍이 국정을 실제로 맡은 핵심적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경문왕을 대신해서 원성왕릉에 배알하였다거나 872년 황룡사9층목탑 개건 불사를 추진할 때 총책임자로서 주도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상국으로서 태제라고도 불린 것 자체에 그런 의미가 담긴 듯하다. 사실 경문왕이 추진한 제반 개혁 작업을 위홍이 전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장조카인 헌강왕이 즉위하던 해에 상대등이 된 사실에서도 유추된다. 이후 오래도록 상대등의 임명 사례가 보이지 않는데, 진성여왕 2년(888)에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계속 이어간 듯하다. 진성여왕과 특수 관계였던 듯이 기록된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처럼 실권자로 군림하면서도 굳이 여왕을 승계시켜 직접 즉위를 도모하지 않은 점은 특이하다. 이는 경문왕이 추진한 하대 원성왕계의 대동단결 정책을 염두에 둔 입장이 강하게 견지된 데서 말미암지 않았을까 싶다.
[A-00-540]소자(小子)
소자는 여러 뜻으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내용상 조카를 지칭한다.
[A-00-541]훼황산(卉黃山)
진성여왕의 주검을 화장해서 뿌린 산 이름. 미황산(未黃山)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천 서쪽의 모량부 방면일 것으로 짐작될 뿐 구체적인 위치는 가늠하기 힘들다. 「삼국사기」 권32 제사지(祭祀志)에 산천 대상의 소사(小祀) 가운데 하나로서 보이는 훼황(卉黃)과 같은 곳이라 추정된다.
[A-00-542]후고려(後高麗)
궁예(선종)가 건국한 왕조를 지칭하는 특이한 표현. 아마도 태조 왕건을 시조로 하는 뒷날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서 왕력편에서만 임시로 사용된 듯하다. 901년 견훤(甄萱)이 백제의 건국을 표방하자 궁예도 왕이라 자처하면서 신라와 당이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켜 옛 도읍인 평양을 황폐화시킨 데 대한 복수를 앞세웠다. 그러면서 고구려를 부활시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호를 고려로 칭하였다. 궁예가 901년 국호를 고려라고 한 기록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이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할 때와는 달리 아직 독자적인 연호를 따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연을 비롯한 뒷날 고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조와 구별해서 궁예의 고려를 굳이 후고려라고 한 것 같다. 오늘날에는 이를 편의상 후고구려라 일컬어 고려와 구별하고 있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하고 이듬해 수도를 새로이 철원으로 옮기면서 연호도 성책(聖冊)으로 바꾸었다. 911년에는 다시 태봉(泰封)으로 국호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하였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면서 다시 고려를 국호로 삼았다.
[A-00-543]궁예(弓裔)
?∼918. 후고구려의 건국자. 신라 왕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가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이라고도 하나 이를 보증할 만한 기록이 달리 없다. 어머니가 헌안왕의 궁녀였던 까닭에 외가에서 길러졌다고도 한다. 궁중에서 파견된 사자가 죽이려고 던졌을 때 유모가 받으려다가 아이의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 즉 흥교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스스로 선종(善宗)이고 불렀다. 진성여왕 5년(891) 죽주(竹州)를 근거지로 한 기훤(箕萱)에게 투탁하였으나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자 이듬해(892)에 북원을 근거지로 삼은 양길(梁吉)에 의탁하였다. 이후 양길의 지시로 원주 이동 방면, 특히 동해 연안 일대에서 군공을 크게 세워 일정 정도의 자립적 기반을 구축한 뒤 하슬라(강릉)에 주둔하면서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901년에는 왕이라 자칭하면서 주민 규합을 위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래서 순흥의 부석사 벽화에 그려진 신라 국왕의 초상을 칼로 베고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불렀다 한다. 이는 신라 중앙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지닌 고구려 계통의 주민을 규합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궁예는 904년에는 정식으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면서 관부와 관직을 체계적으로 설치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905년에는 철원을 새 수도로 삼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바꾸면서 궁궐과 누대를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911년에는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어느 정도 정치적 성공을 거두자 궁예는 미륵불이라 자처하면서 금책(金幘)을 쓰고 가사(袈裟)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靑光)보살, 막내를 신광(神光)보살이라 불렀다.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어 위엄을 과시하였다. 자기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심지어 915년에는 부인 강씨와 자신의 두 아들까지 죽이는 등 극심한 광기를 보였다. 이에 918년 측근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모의해 반기를 들어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궁예는 이를 알고서 도망치다가 부양[斧壤: 현재의 평강(平康)] 백성에게 붙잡혀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궁예는 891년 궐기하여 28년 만인 918년에 몰락하고 말았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궁예” 참조.
[A-00-544]후백제(後百濟)
견훤이 892년 광주(光州)를 첫 근거지로 삼아 출범한 왕조국가. 견훤은 901년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정식으로 백제왕이라 칭하면서 건국을 선언하였다. 사실 견훤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국호는 백제였지만 삼국 시대의 백제와 구별 짓기 위해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후백제라고 불렀다. 본 왕력편에서는 궁예의 건국이 뒤늦었음에도 이를 후고려라고 칭하면서 의도적으로 후백제에 앞서 배치해 두고 있다. 이는 삼국의 정립 시점에 의도적으로 맞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서 936년 후백제 멸망을 신라와는 다르게 국제(國除)라 하고 이를 총칭해서 통삼(統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후백제” 참조.
[A-00-545]대순(大順)
당나라 소종(昭宗)의 연호. 890~891년 사용. 이때에 연호를 표기한 것은 왕력의 기술 방법상 매우 이례적인데 궁예가 처음으로 등장하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
[A-00-546]북원(北原)
현재의 강원도 원주(原州). 원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었으나 신라가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문무왕 18년(678)에 이르러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가 얼마 뒤 북원경으로 고쳤다. 신문왕 5년(685)에 서원(西原)과 남원(南原)에도 비슷한 소경을 설치해 이른바 5소경을 완비하면서 북원에다 축성하였다. 동원경이라고도 불렀다. 신라 말기 지방 세력이 곳곳에서 궐기하였을 때 양길(梁吉)이 북원성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 태조 23년(940) 지방을 새로 분정할 때 북원을 원주로 고쳤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북원” 참조.
[A-00-547]양길(良吉)
양길(梁吉)이라고도 한다. 진성여왕 3년(889) 지방에서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는 등 사벌주를 비롯한 각지 유력자들이 실정(失政)에 반발해 드세게 일어났다. 바로 이 무렵 양길도 북원(北原)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자립을 표방하였다. 진성여왕 5년(891)에는 휘하에 들어온 궁예로 하여금 북원 주변과 함께 동해 연안의 명주(溟州) 등 10여 군현까지 장악하게 하였다. 궁예가 점점 세력 기반을 크게 일구어 독립을 외치자 양길은 국원(國原) 등 10여 성의 성주를 동원해 궁예를 쳤다가 도리어 패배하였다.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양길” 참조.
[A-00-548]철원성(鐵圓城)
철원은 고구려가 처음 사용한 지명. 원래 모을동비(毛乙冬非)라 하였다. 신라 경덕왕 대에 철성(鐵城)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대에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894년 양길의 휘하에 있던 시절 궁예는 철원을 장악해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이때 송악군의 왕건이 투탁하자 그를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본 왕력편에서는 896년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아직 국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이므로 사실상 도읍은 아니었던 셈이다. 궁예는 901년 송악군에서 스스로 국왕이라 칭한 뒤 도읍을 옮기기 위해 903년 철원과 부양(斧壤) 두 지역의 지세를 살피고는 904년 7월 청주(靑州) 사람 1천 호를 동원해 철원이 수도의 면모가 갖추어지도록 하였다. 이듬해(905)에 철원으로 옮겨 궁궐과 누대를 호화스럽게 수리하였다. 아마도 이 무렵 왕도의 방어를 위한 본격적인 축성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사항은 본조 각주 “철원경”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철원경” 참조.
[A-00-549]동주(東州)
원도 철원읍의 고려 시대 지명. 고구려 때에는 철원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 대에 철성(鐵城)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대에 다시 원래의 지명으로 되돌렸다. 그러다가 철원에서 즉위한 고려 태조가 이듬해(919)에 본거지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철원을 동주라고 고쳐 불렀다. 자세한 사항은 본조 각주 “철원성” 참조.
[A-00-550]송악군(松岳郡)
현재의 경기도 개성. 원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이었다. 이를 송악으로 고친 시점을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효소왕 3년(694)에 송악과 우잠(牛岑) 등의 2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보이며, 같은 책 권35 지리지에도 역시 송악성 축성 기사가 확인된다. 이로 보면 부소갑을 송악으로 고친 시점은 바로 이 무렵을 하한으로 그 이전이라고 봄이 온당하다. 신문왕 대에 9주 5소경제가 완비된 사실을 고려하면 이 일대는 신라 영토의 최북단이었으므로 축성 등을 통해 방어망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지명 개정을 도모하였을지 모른다. 이후 북쪽 패강진 방면이 본격적 영역으로 개척되면서 송악군 일대도 크게 개발된 것 같다. 특히 장보고의 몰락으로 청해진이 해체된 뒤 그로부터 이탈한 주민이 서해 연안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뒷날 왕건 세력의 바탕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895년 무렵 이 지역을 근거로 한 왕건이 투탁하자 궁예는 898년 이 방면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918년 철원경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태조 왕건은 이듬해에 본거지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고려의 왕도로 정착되었다.
[A-00-551]견훤(甄萱)
867∼936. 후백제의 건국자. 상주 가은현(加恩縣) 출신. 성은 본래 이씨였는데, 뒷날 견(甄)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벌주 지역의 유력자로서 뒷날 장군이라 칭하면서 독자 세력임을 선언한 아자개(阿慈介). 아자개를 진흥왕의 혈통과 연결하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후대의 부회일 따름이다. 광주(光州)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설화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견훤은 신라의 병사가 되어 왕경에 잠시 차출되었다가 서남 방면으로 파견되어 군공을 세움으로써 비장(裨將)까지 승진하였다. 진성여왕 3년(889) 신라 지배 체제가 흔들려 각지에서 지방 유력 세력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견훤도 진성여왕 6년(892) 무주(武州)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독자 세력을 표방하였다. 900년에는 무주에서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로 근거지를 옮겨 이를 도읍으로 삼아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컬으면서 백제의 부활을 내세웠다. 이에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어 건국 사실을 알리는 등 국제무대에까지 얼굴을 내미는 등 이후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935년 큰아들 신검과 둘째 아들 양검이 모의하여 넷째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러주려는 견훤을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금강을 죽였다. 이에 견훤은 3개월 뒤 탈출하여 고려에 항복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견훤” 참조.
[A-00-552]광주(光州)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삼국사기」 권36 지리지에 의하면 원래 백제의 영토로서 신문왕 6년(686) 무진주(武珍州)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책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498)조에는 무진(주)이란 지명이 이미 보이며 또 본서 권2 기이 제2 「문무왕법민」조에도 같은 지명이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백제가 무진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덕왕 대에는 무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광주로, 성종 무렵에는 해양(海陽)으로 바꾸었다. 다만, 왕력편에서 광주라고 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미 후삼국 시기부터 광주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고 볼 여지도 없지 않다.
[A-00-553]효공왕(孝恭王)
신라 제52대 왕. 이름은 요(嶢). 제49대 헌강왕의 서자. 어머니는 김씨로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본 왕력편에서는 문자(文資)왕후라고 하나 잘못인 듯하다. 왕비는 박씨로서 이찬 예겸의 딸이다. 헌강왕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길에서 만난 여인과 관계를 맺어 요를 낳았다 한다. 아마도 그런 사정 때문에 즉위는 순조롭지 않았을 듯하다. 진성여왕이 재위 9년(895) 조카인 요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진성여왕이 골법(骨法)으로 헌강왕의 혈통임을 각별히 강조한 것도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아마도 효공왕의 뒤를 박씨가 승계하는 배경으로 작용한 것도 그런 분위기가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지방 세력이 흥기하는 등 기존 신라의 지배 체제가 밑에서부터 무너지던 양상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효공왕이 재위 16년에 사망하자 사자사(師子寺)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다만, 본 왕력편에서는 사자사의 북편에서 화장해 뼈를 구지제(仇知堤)의 동쪽 산허리에 묻었다는 약간 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공왕」조 “효공왕” 참조.
[A-00-554]문자왕후(文資皇后)
문자왕후는 제48대 경문왕의 왕비 시호이므로 여기에는 잘못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효공왕에게는 할머니인 셈이다. 다만, 효공왕의 어머니 시호가 할머니의 것과 같을 수는 있겠지만 출신으로 미루어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같은 시호를 사용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점도 그런 추정을 방증해준다.
[A-00-555]사자사(師子寺)
신라 왕경에 있던 절.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효공왕의 화장지나 무덤의 위치가 사자사를 기준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효공왕릉의 위치는 경주시 배반동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가 않다.
[A-00-556]마진(摩震)
궁예가 건국한 나라의 여러 국호 가운데 하나. 궁예는 처음에 고려라 칭하였으나 904년 마진으로 고치고, 이때부터 무태(武泰)란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A-00-557]무태(武泰)
궁예가 904년 국호 고려를 마진으로 고치면서 처음 사용한 연호.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로 바꾸었다.
[A-00-558]주량(朱梁)
당이 멸망한 뒤에 성립한 오대십국 가운데 제일 먼저 세워진 왕조. 907년 건국되어 923년까지 3대 16년간 존속. 도읍은 개봉(開封). 당의 군벌 출신인 주전충(朱全忠)이 당의 혼란을 틈타 집권해 마지막 황제인 애제로부터 양위 받는 형식을 취해 즉위하였다. 일반적으로 남조의 양(梁), 소량(蘇梁)과 구별해 후량(後粱)이라고 하나 주전충이 세웠다고 하여 주량(朱梁)이라고도 한다. 923년 제3대 황제 말제(末帝) 대에 후당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공왕」조 “주량” 참조.
[A-00-559]신덕왕(神德王)
신라 제53대 왕. 성은 박씨. 원래 이름은 수종(秀宗)이었으나 경휘(景暉) 또는 경휘(景徽)로 고쳤다. 박씨이며 갑작스레 즉위한 탓인지 신덕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본 왕력편과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신덕왕조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 논란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아버지를 선성(宣聖)대왕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라 하였고 어머니는 정화(貞和)태후, 왕비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義成)왕후라고 하였다. 이와는 달리 본서 왕력편에서는 다른 왕들과는 서술 순서부터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어머니인 진화(眞花)부인을 먼저 소개하면서 성무(成武)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순홍(順弘)의 딸이라 하였다. 예외적으로 정화부인의 조부(신덕왕의 외증조부)까지 소개하여 원린(元隣) 각간이라고 하면서 제8대 박씨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원손(遠孫)임을 내세웠다. 이를 받아들이면 외가까지도 박씨가 되는 셈이다. 그 다음으로 부계(父系)를 소개해 아버지를 흥렴(興廉)대왕으로 추봉된 이찬 문원(文元), 할아버지를 해간(海干, 즉 파진찬) 문관(文官)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아버지라고 한 각간 예겸은 각별히 의부(義父)로서 소개하고 있다. 이는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그래서 신덕왕이 박씨임에도 즉위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의부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많다. 왕비에 대해서는 자성(資成) 또는 의성(懿成)왕후 혹은 효자(孝資)라 하면서 가계를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처럼 제49대 헌강왕의 딸로 봄이 온당할 듯하다. 신덕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왕력편에서는 서술 방식도 특이하려니와 「삼국사기」와는 내용상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는 박씨의 즉위 배경과 연동해서 많은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전왕인 효공왕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였으므로 국인들이 추대해 즉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석연치가 않다. 신덕왕은 낭공대사(郎空大師) 행적(行寂)을 왕경으로 불러 즉위하기 이전 자신이 살던 남산(南山) 자락의 집을 실제사(實際寺)로 만들어 거주하게 하였다고 한다(「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 사망한 뒤에는 화장하여 뼈를 잠현(箴峴)에 묻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죽성(竹城)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효공왕」조 “신덕왕” 참조.
[A-00-560]박(朴)씨
신라의 국가 시조인 혁거세가 처음 사용하였다는 성씨. 물론 그 자체는 빨라도 6세기 후반 이후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후대에 소급 부회되었음이 분명하다. 신라 초기 왕계에 제1대 혁거세왕 이후 제4대 석씨 탈해왕이 사이에 잠시 끼어든 적이 있지만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에 이르기까지 박씨가 줄곧 왕위를 잇다가 제9대 벌휴왕(伐休王)이 즉위하면서 한동안 석씨로 교체되었다. 이처럼 상고기에 박씨 왕위의 시대는 아달라왕으로 끝이 났다. 그러다가 수백 년이 흐른 뒤 갑작스럽게 신덕왕이 박씨 아달라왕의 원손으로서 즉위하였다고 한다.
신덕왕의 즉위로 왕성(王姓)이 달라졌음에도 이를 왕조(王朝)의 교체가 아닌 왕실 교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음은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 사례에 속한다. 효공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여 국인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하나 김씨가 모두 소멸한 것이 아닌 이상 출자가 전혀 다른 성씨가 왕통을 이은 데는 어떤 커다란 정치적 사정이 바탕에 깔렸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전개되어 신라사의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미 하대에는 출발부터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는 순조롭지 못한 왕위 승계의 양상이 약간씩 드러나고 있었다. 이를테면 원성왕의 즉위, 그의 아들이 아무도 즉위하지 못한 사실, 조카인 애장왕을 여러 숙부들이 모의하여 죽이고 순서대로 즉위한 사실, 흥덕왕 사후 치열하게 전개된 왕위 쟁탈전, 문성왕의 뒤를 숙부인 헌안왕이 승계한 사실, 경문왕이 국왕의 사위로서 승계한 사실, 이후 형제가 승계하고 특히 여왕이 즉위한 사실, 서자가 왕위를 승계한 사실 등 오랜 기간 비정상적 왕위 승계의 사례를 겪으면서 박씨의 승계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저절로 마련되었을지 모른다. 다만, 박씨 왕이 견훤(甄萱)의 강제에 의해서 부자 3대로서 끝이 나고 다시 김씨 경순왕의 즉위로 되돌아간 사실로 미루어 순조롭지 못한 복잡 미묘한 과정을 거쳤을 것임은 충분히 상정된다.
[A-00-561]경휘(景徽)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이름. 경휘(景暉)라고도 쓴다. 본래는 수종(秀宗)이었으나 이처럼 고쳤던 것 같다.
[A-00-562]수종(秀宗)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본래 이름. 뒷날 경휘(景徽 또는 景暉)로 바꾸었다. 아마도 제42대 흥덕왕의 원래 이름과 같아 그를 의식해서 고쳤던 것 같다.
[A-00-563]진화(眞花)부인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어머니. 「삼국사기」에는 정화(貞和)부인으로 되어 있다. 진(眞)과 정(貞)의 글자체가 비슷하여 서사나 판각에서 빚어진 잘못일 가능성이 크다. 신덕왕이 즉위하던 해(912)에 정화태후로 추봉되었다. 아버지가 성무(成武)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순홍(順弘)이며, 할아버지는 각간 원린(元隣)으로서 제8대 아달라왕의 원손(遠孫)이라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A-00-564]순홍(順弘)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어머니인 진화왕후의 아버지. 신덕왕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박씨라고 하였으나 분명하지 않다. 성무(成武)대왕으로 추봉되었다.
[A-00-565]성무(成武)대왕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어머니인 진화왕후의 아버지의 추봉 시호. 원래 이름은 순홍.
[A-00-566]원린(元隣)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어머니 진화왕후의 할아버지. 신덕왕에게는 외증조부인 셈이다. 제8대 아달라왕의 원손이라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A-00-567]아달라왕(阿達羅王)
신라 제8대 왕. 성은 박씨.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연오랑세오녀」조 “아달라왕” 참조.
[A-00-568]문원(文元)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아버지. 이찬을 역임. 뒷날 흥렴(興廉)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덕왕의 아버지를 선성(宣聖)대왕으로 추존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라고 하여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A-00-569]흥렴(興廉)대왕: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아버지의 추봉 시호. 원래 이름은 문원.
[A-00-570]문관(文官)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할아버지. 해간 즉 파진찬을 역임하였다.
[A-00-571]의부(義父)
일반의 사전적 의미는 피를 섞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맺어진 아버지를 의미한다. 흔히 양부(養父)와도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어머니의 재혼에 의해서이거나 아니면, 상호 맹서나 의제적(擬制的)으로 맺어진 특수 관계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예겸이 어떤 과정과 관계로 신덕왕의 의부가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가계로 보아 별달리 두드러진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신덕왕이 성장하는 데에 의부 예겸의 역할이 일정하게 작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A-00-572]예겸(銳謙)
예겸(乂謙)으로도 쓴다. 「삼국사기」에서는 제53대 신덕왕의 아버지라 하였으나, 본서 왕력편에서는 특이하게도 의부(義父)라고 하였다. 대체로 후자 쪽이 옳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만, 예겸이 어떻게 신덕왕의 의부가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다. 신덕왕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선성(宣聖)대왕으로 추존하였다. 자신의 생부와 의부를 함께 대왕으로 추존한 것은 유난스러운 사례에 속한다. 제49대 헌강왕이 즉위하던 해(875)에 국왕의 숙부로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임명할 때 동시에 대아찬 예겸을 시중에 보임하였는데 6년 만에 물러났다. 이후 관등이 이찬까지 승진하였으나 그 후의 활동상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제52대 효공왕 재위 3년(899) 그의 딸이 왕비로 간택된 사실이 보인다. 신덕왕 즉위년(912)에 선성대왕으로 추존된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의 어느 시점에 사망한 듯하다.
[A-00-573]선성(宣成)대왕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의부(義父)인 예겸의 추봉 시호. 신덕왕 즉위년에 추봉되었다. 제52대 효공왕 왕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A-00-574]자성(資成)왕후
신라 제53대 신덕왕의 왕비. 의성(懿成) 또는 효자(孝資)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김씨로서 제49대 헌강왕의 딸이라 하였다.
[A-00-575]잠현(箴峴)
신라 제53대 신덕왕을 장사 지냈다는 고개.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덕왕을 죽성(竹城)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잠현과 죽성이 같은 곳인지 전혀 다른 곳인지 잘 알 수가 없다.
[A-00-576]경명왕(景明王)
신라 제54대 왕. 박씨이며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義成) 또는 자성(資成)왕후. 왕비는 성희(聖僖)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대존(大尊)의 딸. 35금입택 중 하나인 장사택(長沙宅) 출신으로 보인다. 승영은 신덕왕이 즉위하던 바로 그해(912)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917년에 즉위하였다. 8년의 재위 기간 동안 지방민의 이탈이 가속화됨으로써 사실상 멸망의 지경에 다다른 위기 국면이었다. 경명왕은 923년 창원 봉림사(鳳林寺)에 주석하던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가 사망하자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永會法師)를 보내어 조문하며 중사(中使)를 파견해 부의(賻儀)하고 승탑의 비문까지 써 줄 정도로 글을 잘 지은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사망한 뒤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묻었다고 한 반면 본 왕력편에서는 황복사(皇福寺)에서 화장하여 뼈를 성등잉산(省等仍山)의 서쪽에 뿌렸다고 하였다. 후자의 경우라면 따로 무덤은 만들지 않은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경명왕」조 “경명왕” 참조.
[A-00-577]태조(太祖)
고려 건국자 왕건의 묘호. 본 왕력편은 궁예의 태봉과 따로 구별하지 않고 앞에 후고려라는 국호 아래 왕건을 그 속에서 다루는 구성상의 특징을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김부대왕」조 “태조” 참조.
[A-00-578]철원경(鐵圓京)
철원이 태봉의 도읍이 된 데서 붙여진 지명. 본 왕력편에서는 궁예가 처음 도읍으로 정한 것을 철원성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를 보면 효공왕 2년(898)조에서는 송악군이라 하였고 같은 책 권50 열전 궁예전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다만, 아직 이때에는 왕이라 칭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송악을 정식 수도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주요 근거지였다고 함이 온당할 듯하다. 궁예는 901년에 이르러 비로소 왕이라 칭하면서 이후 국가로서의 체제를 차츰 갖추어 나갔고 904년에는 제도 전반을 재정비한 뒤 905년 철원으로 옮김으로써 왕도의 위용을 갖추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철원경이라 불리었던 것 같다. 918년 고려의 건국자 왕건은 철원경에서 즉위하고 이듬해에 송악으로 옮길 때까지 그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로 보면 철원경이 존재한 기간은 대략 13년인 셈이다.관련 사항은 본조 각주 “철원성” 참조.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철원경” 참조.
[A-00-579]법왕(法王)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경답게 꾸미기 위해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고려사」에서는 북부방(北部坊)에 있다고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경(延慶)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대략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A-00-580]자운(慈雲)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로운 수도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기 위해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북부방에 위치한다고 한 사실로 미루어 법왕사와 가까운 곳으로 짐작된다.
[A-00-581]장사택(長沙宅)
신라 말기 최고 부호들의 집을 특별히 지칭하는 상징인 35금입택(金入宅) 가운데 하나. 금입택은 대체로 유력한 진골 귀족 출신 가문들의 종택이다. 장사택은 제54대 경명왕의 왕비 친정으로 보인다. 경명왕을 비롯해 할아버지 이찬 수종, 아버지 성희대왕 대존(大尊)으로 이어지는 3대 가계가 확인된다. 장사택이란 택호가 무주(武州) 무령군(武靈郡) 장사현(長沙縣)에 집안 대대로 이어진 식읍이나 장원 등이 있었던 데서 비롯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만, 왕경의 망덕사(望德寺) 남쪽인 문천(남천)의 모래사장이 장사라 불렸으므로 저택이 이 부근에 위치한 까닭에 붙여진 택호로 볼 여지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1 기이 제1 「진한」조 “장사택” 참조.
[A-00-582]대존(大尊)
신라 제54대 경명왕 왕비의 아버지. 각간을 역임. 아버지는 이찬 수종(水宗). 신라 말기 최고 부자들을 통칭하는 35금입택 가운데 하나인 장사택 출신.
[A-00-583]성희(聖僖)대왕
신라 제54대 경명왕 왕비의 아버지인 대존의 추봉 시호.
[A-00-584]수종(水宗):
신라 제54대 경명왕 왕비의 할아버지. 이찬을 역임. 헌안왕 2년(858)에 조성된 전남 장흥의 「보림사비로사나불조상기」에 보이는 무주 장사현의 현령인 김수종(金邃宗)이나 경문왕 10년(870)에 작성된 「보림사북탑지」에 보이는 서원부(西原府) 소윤(小尹)인 나마 김수종(金遂宗)을 이 수종(水宗)과 같은 인물로서 헌안왕과 가까운 혈연관계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수종이나 그의 아들 대존은 물론 딸인 경명왕의 왕비도 김씨인 셈이 된다.
[A-00-585]황복사(皇福寺)
신라 왕경 중앙부에 있던 사찰. 황복사(黃福寺)로도 표기한다. 신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고승 의상(義相)이 출가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의상은 625년 출생하여 29세에 출가하였다고 하므로 황복사는 늦어도 653년 이전에는 창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서 권4 의해편 「의상전교」조에는 의상이 황복사에 머물 때 탑돌이를 하다가 층계를 밟지 않고 3척이나 허공을 돌았다고 하여 탑에다 따로 돌층계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설화적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상의 제자 혹은 법손으로서 신라 10성 가운데 한 승려로 알려진 표훈(表訓) 대덕이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 석굴암)의 창건을 주도한 대정(大正) 또는 김대성(金大城)과 황복사에서 이야기를 나눈 사실로 미루어 일시 주지로 머문 적이 있는 사찰로 추정된다. 어느 곳에서 발견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황복(皇福)’이라는 명문 기와(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및 ‘왕복(王福)’이란 명문이 있는 기와(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가 알려져 황복사가 왕복사로 불렸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황복사는 보문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낭산(狼山)의 동북 자락에 3층석탑과 머리 잘린 귀부 및 사지의 존재를 알려 주는 석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추정되어 왔다. 여기에서 1942년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금동제의 「사리함기」가 출토되었는데 뒷날 「황복사금동사리함기」라고 명명되었다. 최근 이 일대에 대한 5차례에 걸친 발굴로 몇몇 비편과 함께 사명이 보이는 목간까지 출토된 바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황복사란 사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과거 발견된 비편이나 목간에서 오히려 ‘▽성신충사(▽聖神忠寺)’, ‘상▽사(上▽寺)’라는 사명이, 특히 706년에 작성된 소위 「황복사출토사리함기」에는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 보이므로 이곳을 선뜻 황복사라 단정하기는 주저된다. 황복사의 위치, 사격(寺格)이나 성격, 여타 유관 사항은 기왕에 모두 이 지역을 황복사로 단정한 바탕 위에서 논의해 온 것이므로 철저히 재검토됨이 마땅하다. 그 가운데 경명왕의 무덤이나 화장터가 황복사였던 사실도 유의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4 의해 제5 「의상전교」조 “황복사” 참조.
[A-00-586]성등잉산(省等仍山)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화장한 뼈가 묻혔다는 산. 지금의 어디인지 잘 알 수 없다.
[A-00-587]후당(後唐)
906년 당나라 멸망으로 시작된 오대십국의 혼란기 가운데 출현한 첫 번째 왕조인 후량의 뒤를 이은 왕조. 923년 건국되어 936년까지 4대 13년간 존속. 진왕(晉王)인 이존욱(李存勗)이 낙양(洛陽)을 근거로 삼아 황제라 칭하면서 당을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당이라고 하였는데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 후당이라 일컫는다. 후당이 후량의 수도 개봉을 공격해 함락시키자 그 말제(末帝)는 자결하였다. 제2대 명종이 반란하여 건국자 장종을 죽이고 개봉으로 천도하였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후당” 참조.
[A-00-588]경애왕(景哀王)
신라 제55대 왕. 박씨로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의 딸 자성부인. 제54대 경명왕의 동복동생이다. 경명왕이 즉위하면서 상대등에 보임되었다. 재위 4년(927)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정벌에 나서자 경애왕이 병력을 파견하여 도왔다. 이에 대한 일종의 보복으로서 후백제 견훤(甄萱)이 신라의 고울부(高鬱府: 영천)를 공격하였다. 이에 위기를 강하게 느낀 경애왕은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건이 1만 명을 파견하였으나 견훤은 벌써 신라 왕경에 진출해 공세를 본격화해가던 중이었다. 때마침 경애왕은 비빈을 비롯한 종실 외척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모여 잔치를 베푸는 도중에 견훤의 기습을 받았다. 견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궁궐로 들어가 약탈을 자행해 왕경을 도륙하다시피 하였다. 이때 경애왕은 비첩 몇 명과 후궁으로 도피하였다가 붙잡히자 자결하였다. 이에 견훤은 효종의 아들인 김부(金傅)를 즉위시키고 돌아갔다. 그가 곧 경순왕(敬順王)이다. 경순왕은 즉위하자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 서당(西堂)에 안치하여 장례를 치르고 남산의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때 태조 왕건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경애왕」조 “경애왕” 참조.
[A-00-589]왕륜(王輪)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송악산 기슭에 있다고 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주로 연등 행사를 벌인 호국의 사찰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A-00-590]내제석(內帝釋)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궁궐 내에 있었으며 제석원 또는 내제원이라고도 하였다. 937년 세워진 「서운사요오화상진원탑비(瑞雲寺了悟和尙眞原塔碑)」에 제석원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이몽유(李夢游)가 지은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에는 개경의 왕궁에 있는 사찰로서 호국제석원(護國帝釋院)이라 부른 사실이 확인된다.
[A-00-591]사나(舍那)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고려 태조 20년(937)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황해도의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에는 사나내원(舍那內院)이라 하였으며, 고려 광종 16년(965) 이몽유(李夢游)가 지은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에는 사나선원(舍那禪院)이라 하였다. 광종(光宗) 26년(975) 김정언(金廷彦)이 쓴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에도 왕성(王城) 사나원(舍那院)이란 사명이 보인다.
[A-00-592]대선원(大禪院)
큰 선원 사찰이란 의미. 대를 천(天)으로 읽어 천선원(天禪院)이라 풀이한 견해도 있으나 파른본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大)임이 확실하다.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앞에 소개한 다섯 개의 사찰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사찰임을 드러내기 위해 구분한 표현인 듯하다. 곧 보제사 이하 다섯 개의 사찰이 선종(禪宗) 계통의 사찰임을 나타낸 것이라면, 앞의 법왕사를 비롯한 다섯 개 사찰은 교종(敎宗) 계통의 사찰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A-00-593]보제(普濟)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로, 대선원 보제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981년에 작성된 「산청지곡사진관선사오공탑비(山淸智谷寺眞觀禪師悟空塔碑)」에는 진관선사가 광종의 명을 받아 머문 사찰이며 성남(城南)의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로 등장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라 하여 왕도의 남쪽 태안문(泰安門)으로부터 북쪽으로 백여 보(步) 지점에 있는 정전이 매우 웅장하며 나한보전(羅漢寶殿)이라고 하였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보제사가 오래되어 퇴락하자 부호들이 출연하여 절을 크게 고치고는 연복사(演福寺)로 바꾸었다. 보제사는 도성의 중앙부에 있었으며 원래 본당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였고 들어가는 앞문은 신통문(神通門)으로서 5층의 누각이었다고 한다.
[A-00-594]신흥(新興)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후삼국의 통합에 공헌한 소위 삼한공신(三韓功臣)을 위한 원찰로서 무차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A-00-595]▽문수(▽文殊)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기 위해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A-00-596]▽통(▽通)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었던 사찰.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이를 원통사(圓通寺)로 풀이하는 견해와 영통사(靈通寺)라고 풀이하는 견해가 엇갈려 있다.
[A-00-597]지장(地藏)
왕건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 기존 철원경에서 새 도읍인 송악으로 옮겨 가면서 왕도답게 꾸미려고 세운 10찰 가운데 하나. 다만 최언위가 940년에 쓴 명주 보현산(普賢山)의 「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에 보이는 지장선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의 5사(寺)와는 달리 대선원인 뒤의 5사 중 일부는 왕경이 아닌 지방에 있었을 여지도 엿보인다.
[A-00-598]유암(乳岩)
개성의 남쪽 산기슭에 있던 바위를 지칭하는 듯하다. 920년에 그 아래에 유시(油市)가 베풀어졌다고 한다.
[A-00-599]유시(油市)
글자 그대로를 풀이하면 기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장을 뜻한다. 아마도 920년에 고려 왕도 전반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설치한 시장으로 보인다. 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속칭 ‘이시(利市)’라고도 불렸다 한다.
[A-00-600]이시(利市)
유암의 아래에 세워진 유시를 속칭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생활을 이롭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듯하다.
[A-00-601]유하(乳下)
유암의 아래에 유시가 열려 생활에 이롭다는 의미에서 시장 일반을 유하라고 불렀다는 뜻인 듯하다.
[A-00-602]대흥사(大興寺)
고려 왕도 개경에 있었던 사찰. 920년 10월에 창건하였는데, 922년에 창건되었다고도 한다.
[A-00-603]일월사(日月寺)
고려 왕도 개경에 있었던 사찰. 「고려사」 권1 세가에는 태조 5년(922)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궁성(宮城)의 서북쪽 송악산 자락에 위치하고 920년 혹은 921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944년 세워진 「오룡사법경대사보조혜광탑비(五龍寺法鏡大師普照慧光塔碑)」에는 법경대사 경유(慶猷)가 이 절에 머물다가 921년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A-00-604]신중원(神衆院)
고려 왕도인 개경에 있었던 사찰. 924년 창건.
[A-00-605]흥국사(興國寺)
고려 왕도인 개경에 있었던 사찰. 924년 창건.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3 흥법 제3 「순도조려」조 “흥국사” 참조.
[A-00-606]묘▽사(妙▽寺)
고려 왕도인 개경에 있었던 사찰. 927년 창건.
[A-00-607]구산(龜山)
고려 왕도인 개경에 있었던 사찰. 929년 창건. 고려 태조 24년(941)에 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에 태조가 주지하기를 요청하였다는 구산선원(龜山禪院)과 같은 사찰로 보인다. 같은 비문에서 의하면 자적선사는 구산법당(龜山法堂)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한편 981년 작성된 「산청지곡사진관선사오공탑비(山淸智谷寺眞觀禪師悟空塔碑)」에는 광종이 기미년(959) 금성(金城)의 북쪽에 있는 구산선사(龜山禪寺)를 진관선사에게 하사해 머물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때의 금성이란 강원도 금화군이었던 분성군(盆城郡)을 고려 태조 때에 고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송악산 자락의 소격서(昭格署) 건물 동쪽 곁에 있었다고 한다.
[A-00-608]위응(魏膺)
신라 제55대 경애왕의 이름.
[A-00-609]경순왕(敬順王)
신라 제56대 마지막 국왕.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서 아버지는 신흥(神興)대왕으로 추봉된 효종(孝宗). 어머니는 계아(桂娥)태후로 제49대 헌강왕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제50대 정강왕 대에 제3재상을 지낸 서벌한 인경(仁慶)이다. 927년 견훤이 포석정을 급습해 초토화시키고 후궁으로 피난해 있던 경애왕을 붙잡아 자결시킨 뒤 김부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으로 신라는 사실상 멸망한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후백제와는 대체로 적대적 관계로 일관한 반면 고려에 대해서는 줄곧 우호적 입장을 유지하였다. 재위 5년(931) 고려 태조 왕건이 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신라 왕경 부근까지 와서 만나기를 요청하자 경순왕은 모든 관원들을 거느리고 교외로 나가 맞아 대궐로 안내하였다. 이에 정성을 다해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태조는 10여 일 동안이나 신라 왕경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경순왕은 혈성(穴城)까지 나가 전송하면서 경명왕 재위 시 시중을 역임한 적이 있던 사촌 아우 유렴(裕廉)을 볼모로 딸려 보냈다. 경순왕은 후삼국의 판도가 거의 고려 쪽으로 기울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해 935년 논의를 거쳐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경순왕은 뒤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 왕경으로 나아갔다. 왕건 태조는 고려의 대궐 동쪽에다 좋은 저택을 마련해 주고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배필로 삼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태자보다 더 높은 지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삼고 봉록 1천 석을 주었다. 신라 왕경인 금성은 경주(慶州)로 고쳐서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고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였다. 고려 제5대 경종(景宗)은 정승공(경순왕)을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그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로부터 얼마 뒤인 경종 3년(978) 사망하자 고려에서 시호를 경순 혹은 효애(孝哀)라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김부대왕」조 “김부대왕” 참조.
[A-00-610]부(傅)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이름.
[A-00-611]효종(孝宗)
제56대 경순왕의 아버지. 어릴 때의 이름은 화달(化達). 제46대 문성왕의 후손. 아버지는 정강왕 때 제3재상이었던 서벌한 인경(仁慶)이며, 경순왕이 즉위하면서 신흥(神興)대왕으로 추봉되었다. 부인은 계아(桂我)태후인데 제49대 헌강왕의 딸이다. 제52대 효공왕 6년(902) 대아찬으로서 시중에 보임되었다. 어린 시절 화랑으로서 수천 명의 낭도로 이루어진 조직을 이끌었다. 이때 가난한 한기부 백성인 연권(連權)의 딸 지은(知恩)이 여종으로 몸을 팔면서까지 힘들게 어머니를 봉양함을 알고 효종은 부모의 도움을 얻어 곡식 1백 섬과 의복을 주고 몸값까지 갚아 방면시켜 주었다. 효종이 이끄는 낭도들 수천 명도 각각 곡식 한 섬씩 내어 이를 도왔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정강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자신의 형인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관련 사항은 본서 권5 효선 제9 「빈녀양모」조 “효종랑” 참조.
[A-00-612]신흥대왕(神興大王)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아버지인 효종의 추존 시호.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김부대왕」조 “신흥대왕” 참조.
[A-00-613]관▽(官▽)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할아버지이며 신흥대왕으로 추존된 효종의 아버지. 의흥(懿興)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각간을 역임. 삼국사기 권48 열전 효녀지은전에 의하면 효종의 아버지는 서발한 인경(仁慶)이라 하였는데, 관▽와의 관계는 알 수가 없다.
[A-00-614]의흥(懿興)대왕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할아버지 관▽의 추봉 시호.
[A-00-615]계아(桂娥)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어머니인 계아(桂娥)태후. 제49대 헌강왕의 딸이다.
[A-00-616]강왕(康王)
바로 앞이 계아태후에 대한 내용인 사실로 미루어 탈락된 강왕(康王)의 앞부분에 들어갈 글자는 헌(憲)으로 추정된다. 다만, 「성주사낭혜화상비」에는 헌강왕을 강왕이라고 줄여서 표기하기도 하였으므로, 원래부터 그 앞에는 헌이 없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A-00-617]무덤은 … 동향동(東向洞)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무덤 위치를 가리킨다.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동쪽으로 향해서 자리한 어떤 골짜기를 지칭하는 것 같다. 현재 경순왕릉은 여러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사적 제244호 지정된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무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A-00-618]도합 992년이다.
신라가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B.C.57년부터 제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까지 헤아린 전체 기간. 본 왕력편에서는 이미 멸망한 나라들인 가락, 백제, 고구려, 후백제 등의 존속 기간을 종합 정리하면서 마지막에는 ‘국제(國除)’라는 공통적 표현을 썼으나, 오로지 신라의 멸망에 대해서만은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같은 칸의 가장 끝에다가 ‘통삼(統三)’이란 표현을 사용해 마무리 짓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는 고려가 신라 왕조의 정통성을 승계하였음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였을지 모르겠다.
[A-00-619]말제(末帝)
후량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 후량은 후당에 의해 923년 멸망당하였다. 이 때문에 따로 시호를 부여할 수 없어 말제라고 불렸다. 흔히 폐제를 칭한 것과는 다른 독특한 표현이다.
[A-00-620]신검(神劍)
후백제의 제2대 왕. 건국자인 견훤의 장남. 견훤에게는 부인이 매우 많았으며 아들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이 훤칠하고 지혜로워 견훤은 연로해지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금강의 형들인 신검, 양검(良劍), 용검(龍劍)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고심하였다. 이에 935년 평소 아버지 견훤을 곁에서 보좌하던 신검이 강주(康州)도독 양검과 무주도독 용검에게 심복 능환(能奐)을 보내어 모의해서 견훤을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는 금강을 죽였다. 그런 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3개월 뒤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금성(錦城)으로 도망쳐 고려에 항복을 요청하였다. 936년 견훤이 자청하여 선봉이 되어 후백제 공략에 나서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군하니 신검도 병력을 보내어 맞섰다. 이때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한바탕 싸움이 벌어져 후백제군을 격파하자 신검도 두 아우와 함께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능환은 목 베어 죽였지만 신검 등이 애걸하자 살려 주고 벼슬까지 주었다 한다. 견훤은 이를 분하게 여기다가 등창이 나 황산(黃山)의 절에서 죽었다. 일설에는 삼형제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2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조 “신검” 참조.
[A-00-621]삼국(三國)을 통일하였다.
여기에서 ‘통삼(統三)’이란 특이한 표현을 하고 있다. ‘삼’은 곧 935년 멸망한 신라, 936년 멸망한 후백제를 가리킴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궁예의 태봉국 전신을 구태여 후고려라 내세운 점이나 신라의 멸망에 대해 국제(國除)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나라를 바쳐 귀순하였다.’라고 한 것은 고구려와 신라 계승 의식을 선택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시대 사정이 바탕에 깔린 것인지도 모른다.
[A-00-622]나라가 없어졌다.
936년 후백제의 멸망을 가리킨다. 신라의 멸망에 대해서는 국가가 건국된 시점부터 멸망 시점까지의 존속 기간만을 나타낸 반면, 후백제에 대해서는 국제(國除), 즉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