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에 출가하여 해양海陽(현재의 광주光州) 무량사無量寺에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한 후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대웅大雄 장로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강석과 선림을 편력하면서 수행한 일연은 동료들에게 구산사선九山四選의 으뜸으로 평가되었고, 22세에는 승과에 응시하여 선불장에서 상상과에 합격하고 포산包山(현풍玄風 비슬산琵瑟山)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선관을 수행하였다. 그 후 22년간 포산의 여러 사찰에 머무르면서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계통의 신앙과 사상을 섭렵하였다.
44세 때인 고종高宗 36년(1249) 일연은 정안鄭晏이 설립한 남해 정림사定林寺에 초청되어 주법이 된다. 54세 때인 고종 46년(1259)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원종元宗 2년(1261) 왕명에 의해 강화江華에 초청되어 선월사禪月寺에서 활동하였다. 원종 5년(1264) 일연은 영일의 운제산 오어사五魚寺로 물러나고 얼마 안 있어 다시 포산包山 인홍사仁弘社로 옮겼다. 11년간 지내오던 포산 인홍사를 중수하고 사액을 받아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하였으며, 포산 동쪽에 있는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삼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한 1274년 일연은 인흥사에서 『역대연표歷代年表』를 간행하였다.
72세 때인 충렬왕 3년(1277) 왕명에 의해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충렬왕 8년 왕은 일연을 내전에 맞이하여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도록 하였고, 그 다음 해 78세의 일연을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원경충조圓徑沖照’라는 호를 내렸다. 국사國師가 아닌 국존으로 책봉한 것은 원元이 그들이 쓰는 국사 칭호를 쓰지 못하도록 간섭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연은 이후 인각사麟角寺로 물러나 머물면서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교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충렬왕 15년(1289) 봄에 일연은 인각사에서 84세로 입적하였다. 왕이 시호를 내려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호塔號를 정조靜照라 하였다.
일연 입적 후 6년이 지난 충렬왕 21년(1295) 혼구混丘(무극無極), 곧 청분淸扮이 작성한 행장에 의거해서 민지閔漬가 짓고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한 「고려국화산조계종인각사가지산하보각국존비명高麗國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銘」이 인각사에 세워졌다. 비의 뒷면에는 진정대선사眞靜大禪師 청분이 세운 경위를 적고 문도와 단월檀越들의 이름을 열거한 음기陰記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에 보이는 일연의 저술로는 『어록語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중편조정사원重編祖庭事苑』 30권 등 100여 권이 있다.